스물셋이라고 실패도 없겠어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첫 부분은 아직까지도 가끔 돌려보곤 하는 장면이다. 임용고시 준비생 혜원(김태리)이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서울에서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아주 좁은 방에서 돈을 아끼기 위해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상한 편의점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그 와중에 같이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남자 친구가 먼저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자신은 떨어지게 된 상황. 그녀는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자신의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왜 왔냐고 묻는 고향 친구에게 바보같이 웃으며 '배고파서 왔어'라고 답한다.
혜원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나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혜원과 내가 여기는 고향은 조금 겹쳐 보였다.
스무 살, 대학 합격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익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에서 나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그곳에서 적응해야만 했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따뜻하고 안락한 그늘과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어진 나의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낯선 곳에서 나는 꽤 잘 살아남았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는 방법들을 하나씩 깨우쳤고, 나를 보호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직접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처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내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다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나를 짓눌렀다. 더불어 연속된 실패들은 저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큰 눈덩이처럼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인간은 가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에게 고향길은 그런 말과 같았다. 대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본가로 향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동은 나에게 익숙함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진정한 휴식처로 향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왕복 8시간쯤 걸리는 '고향 다녀오기' 일정은 꽤 복잡하고, 쉽지 않다. 먼저, 짐을 챙긴다. 겨우 이틀 혹은 사흘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약간의 옷가지와 속옷, 스킨케어 제품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기차역으로 간다. 수도권의 지하철 배차 간격은 참 제멋대로다. 그래서 예상시간보다 더 일찍 나가야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지 않을 수 있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곧바로 기차 타는 곳으로 내려가 이어폰을 착용한 후 노래를 재생한다. 한 두곡쯤 듣다 보면 어느새 3시간가량 나의 몸을 실을 기차가 도착하고, 내 자리를 찾아 몸을 옮긴다. 그렇게 3시간 동안 기차 밖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다 까무룩 잠에 빠지기도 한다. 문득 밀린 과제가 생각나 부리나케 노트북을 켜서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지. 그렇게 무료한 듯 바쁜 3시간이 지나면 종착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또다시 지하철을 향해 수많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그렇게 지하철로 20분. 그 후면 동네에 도착하고, 또 10분이라는 시간을 걸어가면 비로소 나의 고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5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익숙한 비밀번호 8자리를 누르고 문을 연다.
이렇게 3년간 습관적으로 나섰던 고향길은 약간의 도피성을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무언가가 그립다는 것은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니까. 현실에서의 도피라는 말은 과장이 섞인 것 같고, 일상과 고민에서의 도피가 조금 더 가까운 의미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도피해온 방식이 고향길이었다는 점은 꽤 다행이었다. 도피의 또 다른 이름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지라고 생각하기에. 마치 어떤 영화에서 '너 누구 믿고 그러냐?'라고 물으면 주인공이 결의에 찬 눈동자와 함께 'OO 믿고 그런다 왜!'라고 소리치는 것 같달까.
결국 내가 가장 믿은 구석은 고향이었다. 나의 가장 처음을 시작한 곳이자 나라는 사람이 한 해 한 해 성장해온 곳이다. 나의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곳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진 우리가 20년간 함께 살아온 곳이다. 나의 냄새와 발자취가 그대로 담긴 곳이다. 이 곳에서 나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차근히 쌓아왔다. 그저 내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 곳이 나의 뿌리였고, 나의 집이었다.
나는 혜원도 자신의 고향으로 갑자기 떠난 이유가 나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혜원의 엄마가 그리고 나의 가족이 만들어준 고향이라는 작은 숲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상처받고 무수한 실패로 좌절한 순간을 뒤로하고, 그곳에서 휴식하고 충전하며 또 한번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마음을 얻는다. 그래서 나에게 도피성 고향길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나만의 습관 중 하나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