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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개인 Aug 05. 2020

피리 소리를 따라서

<피리부는 여자들>, <여자 나이는 60부터>를 보고 쓴 감상문

 

   스무 살이 되던 해, 밤늦게 술을 먹다가 친구 집으로 자러 갔다. 친구의 어머니가 우리를 반기며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데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죽기는 싫지만 살기도 싫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사랑, 정과 애틋함으로 가득 찬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이 나왔고 도저히 거기 공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을까, 선호와 애정으로 가득한 사회에 평생 적응하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낀 내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딱히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랑하지 않는 나.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가정에서 애착관계를 가져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애착을 못 느끼는 걸까? 그맘때 만난 친구의 집안은 ‘가족 다운 가족’ 같아 보였다.


    호주에서 일할 때 나는 반삭보다 조금 긴 머리였다. 같이 일하던 인도인 직원들과 좀 친해지자 "머리는 왜 짧게 자르는 거야?"라고 물었다. 약간의 눈치로 그 질문이 사실 "너 여자 좋아해?"를 돌려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질문 직전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나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질문은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여자친구 있냐고 떠보듯 물어보던 남사장, 같이 일하던 한국인 친구와 애인 사이냐고 물어보던 직원, “여기는 머리가 짧으면 동성애자라는 편견이 있는데 혹시 너도야?"라고 묻던 집주인.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남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왜 물어본 거 였을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구구절절 내가 어쩌다 머리를 잘랐고 짧은 머리가 얼마나 좋은 지 염불을 외웠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궁금했다. 남자 만날 생각 없으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그렇다고 여자를 안 좋아해본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할 수 있나? 애초에 누굴 연애 감정으로 좋아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며칠 전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밥 먹고 카페를 갔는데 비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친구는 "어른들은 결혼 안 하면 무슨 큰일 나는 것처럼 얘기를 하잖아. 애초에 남의 일인데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지 모르겠어." 라며 내 의견을 물었다. 그 때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머리를 스쳤다. 그 사람들한테는 결혼이 그런 거 아닐까? 남자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게 '정상적'인 건데, 그 정상성에서 벗어나려 하니까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해서 잔소리하는 것 같아.


    대답을 하던 중에 문득 전에 여자친구가 있는 지인 한 분이 떠올랐다.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이었는데 여자친구 얘기가 나왔을 때 아무도 놀라거나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이상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을 따라 분류하려고 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갑자기 우리가 외딴 섬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성애가 정상인 사회에서 여성을 사랑하는 여자들, 남성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외치는 여자들. 우리는 어느새 새로운 세상을 구축해 살고 있었구나.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가지고, 납득할 수 없는 규범을 거부하고, 의심하고, 화내고. 그러는 동안 한 번도 주류인 적 없던 우리는 우리만의 규칙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성애, 가부장제의 규범에서 벗어난 여자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새로운 삶이 있음을 보여준다. 죽기는 무섭지만 딱히 살고 싶지도 않았던 그 해, 나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 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건물을 나왔다. 마흔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는 친구에게 뭔 그런 말을 하냐고 욕했지만, 그러는 나도 사실은 20년 뒤 우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결혼 안하고 살 거라는 다짐은 진심이었지만 비혼인 나의 옆에 함께 하는 다른 여자들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본 게 없으니 그랬겠지. 전시장을 세 번 돌며 <여자 나이는 60부터>라는 그림 앞에 설 때마다 코트 소매 끝을 찝찝할 만큼 축축히 적시며 울었다. 집에 와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또 눈물을 질질 흘렸다. 나 이런 게 보고 싶었구나.


    <피리부는 여자들>에는 세 명의 여성의 삶이 나온다. 여성과 공간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고, 경험을 확장해간다. 마음 맞는 친구와 동거하는 게, 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게 뭐 그렇게 특별하고 신기한 삶의 형태는 아닌 것 같은데 낯설게 다가온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텍스트로 존재하던 비혼 타운이 머리속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삶의 동료를, 주변인을 여성으로 채운 삶. 반찬을 공유하고, 땅굴 팔 때 꺼내 줄 수 있는 사람들로 주위가 북적이는 삶. 2부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관계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였다. “허리 끊어지게 울고 나서도 좋아할 사람은 계속 생겼다.” 불같이 사랑한 본인의 연애기를 뒤돌아보며 하는 감상같은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어쩐지 위로로 읽혀졌다. 세상이 끝난 듯 유난을 떨고 슬퍼하기도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 새로 마음과 시간을 쏟을 것이 또 생긴다는 거. 끝없는 열정을 제일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 긴 행렬을 부르는 그림. 목차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피리 소리를 따라가는 사람일까? 뭐 그렇긴 하겠지만 누군가는 또 내 짧은 머리의 뒤통수를 보며 행렬에 함께 하겠지. 나는 이제 화목한 ‘정상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유년기를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20대 이후의 삶이 막연하던 나는 이제 30대 이후의 안정된 생활을 기대하고 있다. 스무살 그 겨울에 처음 보고 질질 짰던 그 그림을 볼 때는 아직도 운다. 많이 변한걸까? 어찌됐든 내 옆에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고, 외딴 섬이었던 우리의 공간에는 피리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춤을 추고 반찬을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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