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기억, 기억을 위한 생존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독일과 러시아, 벨라루스 세 나라가 협력하여 만들어 2020년에 개봉했고,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부문 영화 International Feature Film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다. 작가 볼프강 코흘하세 Wolfgang Kohlhaase의 소설 《Erfindung einer Sprache (The Invention of a Language)》에서 영감을 받은 독일인 영화감독 바딤 페렐만 Vadim Perelman이 제작과정을 감독했다.
영화는 벨기에계 유대인 질레스 Gilles가 홀로 숲속에 난 철도를 따라 걷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걸어오는 질레스는 카메라를 설치한 각도 때문에 마치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을 향해 걸어오는 거 같다.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호송차에 탄 일단의 유대인들 속에 섞여 있는 의기소침하고 여린 성격에 겁도 많은 질레스는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 마침 질레스 옆에 서 있던 한 남자는 질레스가 점퍼 주머니에 샌드위치를 하나 숨겨두고 있다는 걸 알고서 자신의 페르시아어로 쓰인 고서 한 권이랑 바꾸자고 제안한다. 값비싼 고서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꾸자고 윽박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질려 질레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샌드위치를 꺼내 고서와 맞바꾸었다. 잠시 후 차는 숲속에서 멈추었고 독일군은 다짜고짜 차에 탄 사람을 끌어내려 일렬로 세운 후 사살했다. 살기 위해 질레스는 총이 발포되기도 전에 죽은 듯이 바닥에 쓰러졌는데, 이를 알고 있던 독일군은 질레스를 일으켜 세우며 겁쟁이라고 비웃기 시작했다.
“전 유대인이 아니에요. 뭔가 잘못되어서 전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전 사실 페르시아인이에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비웃으며 독일은 질레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때 품속에 숨겨둔 페르시아어로 쓰인 고서를 꺼내 보이며 질레스는 소리쳤다.
“여기 보세요. 이 책이 제 책이에요. 전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에요.”
“페르시아인? 잠깐만! 클라우스 코크Klaus Koch 부사령관님이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어. 찾아서 데려오면 상도 준다던데. 야, 임마, 너 진짜 페르시아인 맞아?”
“네, 네. 전 페르시아인이 맞습니다.”
“잘됐다. 이 녀석은 내꺼야. 건들지마.”
페르시아어는 그 책을 처음 가지고 있었던 이의 이름 레자Reza와 그 책을 아들에게 준 아버지를 뜻하는 ’bawbaw’라는 단어 외에는 금시초문인 질레스는 그날부터 클라우스 부사령관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기 위해 사관 식당에서 일을 하며 포로수용소 생활을 시작한다. 전쟁 전 유명한 식당 주방장으로 일했던 클라우스 부사령관은 전쟁 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 Teheran에 가서 양식당을 차리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페르시아어를 능숙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단어 중심으로 공부하고 싶어. 오늘부터 하루에 페르시아어 단어 40개를 나에게 알려줘.”
그날부터 레자는 살아남기 위해 하루에 40개씩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만 했다. 스스로 만든 단어를 먼저 기억해야 했고, 그걸 클라우스 부사령관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어라고 클라우스 부사령관을 속이며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건 반드시 기억해야만 했다. 클라우스 부사령관이 포로수용소에서 맡은 일은 독일군 전용 식당 관리와 수용소에 입소 퇴소한 유대인 명단 기록 관리였다. 소심하지만 그래서 세심하기도 한 레자의 명부 기록 방식이 마음에 든 클라우스 부사령관은 여가에 포로수용소 입소 퇴소자 명단 기록도 담당하라고 명령한다. 하루 종일 클라우스 부사령관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레자가 유일하게 편안히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식사 배급 시간이었다. 레자는 이때를 활용하여 새로운 단어를 창조했다.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고 답으로 들은 이름과 그 사람의 인상을 하나로 엮은 후 마음에 떠오르는 상을 즉흥적으로 아무렇게나 말했고, 그렇게 내뱉은 단어는 클라우스 부사령관에게 가르쳐줄 새로운 페르시아어 단어가 되었다. 예를 들면, 제이콥 Jacob이란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레자는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유심히 살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모습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그걸 아무렇게나 말하니 ‘사빳’이 되었는데, 그 순간 ‘사빳’은 부사령관에게 가르쳐줄 페르시아어 단어 ‘슬픔’이 되었다.
그 누구도 친근하게 대하지 않던 클라우스 부사령관이 포로수용소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게 레자였다. 언젠가 ‘나무’를 페르시아어로 뭐라고 하는지를 물었을 때, 레자는 라쥐Radj라고 답했다. 수업 첫째 날 ‘빵’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단어로 라쥐를 이미 사용했다는 걸 레자가 깜빡 잊어버렸던 거다.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민 클라우스 부사령관은 레자를 흠씬 두들겨 팬 후 부하에게 채굴장으로 레자를 끌고 가라고 명령한다. 채굴장에서 고된 노동과 감독관의 집요한 체벌에 지칠 대로 지친 레자는 삶을 포기하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비몽사몽간에 내뱉은 혼잣말은 신비롭게도 자연스레 체득한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창조한 자기만의 언어였다.
“엄마, 보고 싶어요.”
사람이 죽는 순간에 사용하는 말은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운 모국어라는 말이 있다. 사경을 헤매면서 레자가 내뱉은 말은 생존을 위해 자기가 만든 언어였다.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언어 창조에 얼마나 집요하고 철저하게 집중해왔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감독관은 이를 클라우스 부사령관에게 보고했고, 클라우스 부사령관은 수용소 침대에 누워 레자가 중얼거리는 페르시아어를 알아들은 후 레자를 수용소 병동으로 보낸다. 그때부터였다. 입소한 유대인이 모두 퇴소해야 할 날이 오면 레자를 근처 농장에 하루 이틀 보낸 후 다시 수용소로 데려왔다. 입소한 유대인이 퇴소하는 날은 집단 학살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는데, 그날마다 레자를 다른 곳에 보내 살려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역시나 수용소 폐쇄, 독일군의 도망, 수용소에 감금된 포로가 연합군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모습이다. 클라우스 부사령관은 패전 소식을 들은 후 서둘러 수용소에서 탈출한다. 그는 레자도 함께 데려갔다. 레자를 처음 만난 날 페르시아어를 잘 가르쳐주면 군용 음식 20캔을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국가는 버렸지만, 자기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준 유대인을 거두어주는 그의 모습은 선과 악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준다. 군복을 벗고 시민으로 변장한 클라우스는 미리 마련해둔 탈출 경로를 따라 테헤란으로 도망갔다. 공항 출입국 관리소에서 그는 지금까지 레자에게 배운 페르시아어로 유창하게 여행 목적을 공항 직원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는 현지인은 한 명도 없었다. 레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상황을 설명하던 클라우스는 결국 공항 경찰에게 붙잡힌다.
숲속에 홀로 남겨진 레자는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영화의 첫 장면인 정처 없이 걷는 레자의 모습은 사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연합군 임시 막사에 도착한 레자는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연합군 조사관에게 이야기했지만, 이를 증명할 증거는 남아있지 않았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이 기록된 명부는 이미 불에 타서 재로 변해 사라졌다.
“대략 몇 명이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천 명은 족히 넘을 거예요.”
“혹시나 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 기억나는 게 있나요?”
“네, 전 2,080명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질레스의 마음에는 흔적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2,080명의 이름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자기가 창조한 자기만의 언어 2,080개와 함께. 2,080명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해야 할 건 그가 창조한 단어 2,080개를 하나하나 떠올려 내는 일이었다. 질레스는 담담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홀로 개발했던 자유연상을 되새기기 시작한다. 자기가 만든 언어의 단어 하나와 그 단어를 창조하는데, 도움을 준 한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해야만 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살아있으므로, 죽은 자를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단어였고, 그 단어는 자그마치 2,080개였다.
2023년 8월 20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