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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Jul 14. 2024

2024년 미국연합감리교회
중북부 지역 한인 총회

Korean Pastors in the UMC

2024년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일리노이주 윌링(Wheeling)이란 도시에 있는 시카고 제일한인연합감리교회(Chicago First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진행된 미연합감리교회 한인 목회자 가족 수양회 및 총회를 다녀왔다. 다코타스(Dakotas), 미네소타(Minnesota), 위스콘신(Wisconsin), 아이오와(Iowa), 북부 일리노이(Northern Illinois), 미시간(Michigan), 인디아나(Indiana), 오하이오(Ohio), 총 여섯 개 주에 걸쳐 곳곳에 흩어져 사는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한인 목사와 가족이 일 년에 한 번 한자리에 모여 사흘간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새로운 걸 보고 듣고 배우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뉴저지(New Jersey)에서 14년을 살고 위스콘신으로 이사 온 2021년 7월 3일부터 일 년간 내 삶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내가 뼛속까지 도시 사람이란 걸 거듭 확인했고, 미국이란 나라의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만큼 미국인의 삶은 어마어마하게 다양하고 다채롭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여 깨달았다. 차로 15분이면 삶에서 필요한 모든 곳에 아무런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뉴저지 매디슨(Madison)에서 산 14년은 미국 전역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매디슨과 비슷하리라는 환상을 안겨줬다. 위스콘신 폴티지(Portage)는 환상 밖의 세상이었다. 대다수 미국이 살고 있는 현실이었다. ‘도시’라는 행정구역명이 붙고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사면은 호수와 숲으로 이루어진 시골이다. 도시 전체 인구 중 97% 이상이 백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백인 중 과반수 이상은 직간접적 바이킹의 후손이기에 장대한 골격과 뼈대는 포티지를 거인 공화국처럼 보이게 한다.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기 위해 어느덧 3년간 부단히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낯설고, 난 바이킹 후손이 대서양을 건너 약속의 땅에 도착한 후 고향과 비슷한 기후를 갖춘 곳을 찾아와 터전을 삼은 곳에 어느 날 아무런 연고 없이 굴러 들어온 이방인일 뿐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후로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노력해서 달려간다. 미국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두 아들에게 이곳은 미국의 새로운 면모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하루하루 위협받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전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시간을 내고 노력을 들여 찾아가야 한다.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총 72명. 역대 최고로 많은 한인 목회자 가정이 등록했다는 2024년 가족 수양회는 유쾌하고 즐거웠다. 같은 말을 쓰고, 기본적으로 엇비슷하게 사물을 파악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글로 생각을 주고받는 시간 그 자체가 한국인의 유전자를 재점검하는 시간이다. 말은 미국 교회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 교회의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으로 유학온 신학생이 미국 교회에서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로 살겠다는 미국인은 이제 가뭄에 콩 나듯이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급속하게 발달한 미국 경제와 이에 편승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미국 교회는 경제 성장의 평준화 이후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세속화와 탈기독교화 시대정신에 휘둘리며 쇠퇴 현상은 뒤집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미국 교회를 지키는 한국인 목사 중 한 명인 난 가끔 평일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이곳에서의 내 삶이 미국 교회를 지키는 '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볼 때도 있다. 같은 처지지만 서로 너무도 다른 상황 속에서 힘겹게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여 머릿속 어딘가에 설치해 둔 한/영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고, 감정이 깃든 언어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고 후련함이다. 


가끔 내 두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지만 집안에서는 여전히 한국인어야 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번 수양회에서 좋았던 또 한 가지 사항은 두 아들과 비슷한 여건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수양회에 참석했기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3박 4일 동안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딜 가나 빠르게 적응하는 둘째 녀석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에 괘념치 않고 처음 만난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다. 가지고 간 축구공으로 축구 연습과 시합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멀리서 슬쩍 쳐다보며 안심했다. 반대로 첫째 녀석은, 저 나이 때 나를 빼닮아서 그런지, 여전히 아이들 속에 들어가질 못하고 겉과 속 경계선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루 잘 보냈니? 재밌었고?"라고 묻는 엄마의 질문에는 어김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니요. 재미없었어요."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모처럼 식탁 한가득 나오는 한국 음식 앞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앉아서 모든 음식을 자기 뱃속에 쑤셔 넣어 승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먹고 있다. 외롭게 앉아 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진지하게 한국 음식을 먹는 녀석을 보면서 '저렇게 쑤셔 넣는 음식은 왜 키로도, 살로도 가지 않는 걸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애틀랜타(Atlanta)에 있는 급속하게 성장 중인 한 성결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목사로 일하는 이혜진 목사가 첫째 날과 둘째 날 강사로 왔다. 임원진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에 관해 알지 못했다. 한평생 개척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그는 결코 교회를 개척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단다. 서울대학교 학부에 입학한 후 일주일에 과외를 세 개씩 하며 아버지 교회 월세를 벌어 매달 꼬박꼬박 헌금했다. 자기 힘으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단다. 아버지 교회가 성결교회였기에 성결교단 신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성결교회 목사가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교회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중 아버지를 생각하며 제일 작고 재정 형편이 어려운 성결 교회를 찾아가서 일했다. "교인이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 새로운 교회로 이동하면 우린, 그러니까 목사는, 그걸 수평 이동이라고 해요. 하지만, 이걸 아셔야 돼요. 교인들에게 그건 수평 이동이 아니라 '상향' 이동이란 걸요. 교인은 자기의 영적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교회를 찾아서 이동합니다." 2021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유튜브(YouTube)에 예배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부터 급속하게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교인수은 대략 1,500명. 건설업체에 팔려 허물어진 후 아파트 단지로 변할 교회를 발견한 후 그 교회를 구입하기 위해 애썼고 올 10월에 계약을 완료할 준비 중에 있다. 아이가 다섯 명. 아내는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중에 있다. 이혜진 목사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의 말과 태도에서 풍겨 나오는 패기와 도전 정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말씀으로 교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무조건 동의하는 부분이었고, 그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서 그가 얼마나 차분하고 진지하게 성경 구절 사이에 숨겨진 공백을 찾아내 메꾸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 날 강의가 끝나고 사진을 함께 찍자고, 연락처를 주고받자고 서있는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 슬쩍 다가가 말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동갑내기네요." 잠깐 눈을 마주치며 간단하게 '한국식' 악수로 인사했다. 


밤 9시에는 7명에서 9명씩 조를 이루어 조금 더 깊이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첫째 날 이야기 주제는 "지난 일 년 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혹시나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였고, 둘째 날 이야기 주제는 "그럼 이제 앞으로 펼쳐질 일 년 간 어떤 목회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까?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였다. 은퇴한 목사님의 사모님, 나보다 5살 더 많은 목사님, 50대 후반 목사님의 사모님 두 분, 60에 이른 목사님, 원래 남편이었던 목사는 조기 은퇴했고 그를 대신해서 목회를 시작한 여자 목사님, 그리고 나.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어느 누구의 삶 속에 배어 있는 어려움과 안타까움을 '그 아픔 이해합니다. 공감합니다.'라는 오만한 한 마디로 외면할 수 없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내가 들은 걸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고, 아내가 들은 게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설령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이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배우자와 나누고, 부모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는 아이 또한 그 소식을 알게 되겠지만, 난 이틀간 들은 다른 이의 아픔과 희망, 갈등을 흥미 유발을 위해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을 거다. 


고속도로를 타고 시카고 근교 지역을 벗어나면 고층 건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이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일리노이주를 지나 위스콘신에 들어서면 허허벌판은 삼포식농법이 만든 세 가지 색깔로 물들어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일상. 日常.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다시 신영복 선생님을 생각한다. 아무런 죄 없이, 하긴 윗사람에게 넙죽 엎드리지 않은 게 죄라면 죄겠지만, 선생님은 20년간 감내해야만 했던 감옥을 대학으로 승화시켰다. 大学. 그에게 감옥은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 준 곳이고 큰 배움을 건넨 장소였다. 2021년에 처음 알게 되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포티지(Portage). 이 시골 도시가 나 자신을 끝없이 뒤돌아보고, 어제보다 딱 10퍼센트 더 나은 오늘을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대학이 될 수 있기를, 대학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소학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4.07.1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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