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둥 Nov 29. 2022

27. 12,500원만큼의 우울함

휘청거릴 땐 모래주머니가 필요합니다

 지난 일요일 결혼식은 호텔에서 새로 지은 공간에서 열린 첫 결혼식이었습니다. 지난 10월 쇼케이스 이후 예약되어 처음으로 실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보니 여러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기존 공간들에 비해 작아 스몰웨딩에 가까운 데다 첫 실전이다 보니 플라워팀이나 연회팀 동선이 꼬이기도 하고, 애초에 여유공간이 없어서 행사를 설치하고 철수하는 데 꽤나 힘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신부대기실을 맡아서 했는데, 예상보다 소파 뒷 공간이 좁아 사진 촬영 각이 안 나오는 바람에 기획했던 것과 다르게 꽃을 배치하게 되어 아쉬움도 많았어요.


 생각보다 정리하는 시간이 늦어서 독서모임에 45분 정도 지각했습니다. 책의 주제가 어렵기도 하고, 생각보다 서로 논의할 것들이 엄청 많아서 세 시간이 모자랐어요. 발제자분이 책의 주제와 너무 잘 맞는 분이셨고, 준비도 정말 꼼꼼히 해오셔서 다음에 한번 더 논의할 기회를 잡기로 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어요. 일본 여행을 다녀온 여파로 일주일 동안 휴일 없이 근무하기도 했고, 첫 행사 후 퇴근하고 바로 독서모임에 간 데다 머리와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주제였어서 뭔가 마음이 꾹꾹 눌려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날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친구를 불러서 맥주라도 한잔 하며 마음을 풀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돌아오는 지하철(2번 환승하고 1시간 20분이 걸리는) 내내 했습니다. 그러나 일요일 저녁인 데다 (저는 내일 쉬지만), 내일 오전에 약속이 있기도 해서 그냥 집에 가는 길에 먹을거나 사서 들어가자고 합의를 봤어요.


 그 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또 고민이 생깁니다. 치킨을 사 가면 한 마리는 절대 못 먹고 남기는데, 식은 치킨은 냄새에 민감한 편이라 그대로 버려야 하는 문제가 있거든요. 타코야끼를 사 갈까, 닭강정이 나으려나, 아니면 잠깐 동네 마트에 들를까 하다가 독서모임을 한 공간에서 마신 흑맥주(13,000원)와 내가 남기는 게 너무 아까워하는 동네 치킨집의 양념 반 후라이드 반 포장 가격(12,500원)을 대하는 저의 태도의 간격에 반성하며 과감하게 한 마리를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소비는 참 고민을 안 하다가도 어떤 가격에는 참 민감해지는 건 여전히 알 수 없는 집착이에요.


 집에 와서 후다닥 씻고, 아직 뜨거운 치킨을 꺼냄과 동시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고, 넷플릭스를 켜면서 치킨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바삭한 후라이드와 달달한 양념을 이토록 간편하고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싼 행복일까요. 집에서 쉬고 있을 친구들을 불러내어 떠들썩하게 한풀이를 하는데 들일 무례와 시간과 가격은 사실 12,500원으로 대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철 내내 빠져있던 못된 마음이 참 가볍고 하찮게 느껴졌어요. 제가 느끼는 대부분의 슬픔과 걱정과 후회와 우울함 등등의 어둡고 가라앉는 어떤 것들은 사실 12,500원이면 다 해결될 수준입니다.


 넷플릭스와 카카오 웹툰과 치킨(양반후반/12,500원)으로 이루어진 2시간에 걸친 한풀이 끝에 마음은 아주 가벼워지고 배는 무거워졌습니다. 며칠 전에 동네 마트에서 엄청 큰 한 봉지 10,000원에 가져온 단감을 까먹으며 뒷정리를 하고 가볍게 집을 청소했어요. 단감이 아주 싸고 맛있어서 좋아했는데 올해 단감 가격이 엄청 떨어져서 수확을 하지 않고 버려지고 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한 봉지 더 사 와야겠어요.

 


 버려지는 단감들은 수확비용보다 판매비용이 더 낮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해 단감 농사가 잘되어 수확량이 많고 맛도 좋다고 해요. 지금은 늦은 단감이 이른 귤보다 훨씬 맛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단감을 사십시오.


 월드컵 기간 동안 경기날을 피해 치킨을 주문하셔야 합니다. 일정을 놓치셨다가는 치킨을 먹고 싶은 날에 주문을 할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거든요. 오히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주기적으로 치킨을 복용해 경기 당일 치킨이 당기지 않게 하는 엇박자 컨트롤이 필요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서로의 기분을 살피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