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몽골 여행을 준비하면서 상비약을 챙기다가, 약사가 알려주는 약국 이용 꿀팁이라는 숏츠를 봤어요. 약국에 들어가 어디를 며칠정도 여행하려고 하는데, 상비약을 챙겨달라고 하면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의 조합을 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매장 근처 약국에서 몽골여행을 준비 중이라 하고 상비약을 샀더니 어떤 멀미약이 좋은지(패치형 멀미약은 너무 강해서 권하지 않는다) 따로 신경 써서 대비해야 할 병은 없으니 기초 상비약만 챙겨가라(음주 전후 숙취해소제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등 자세한 설명도 듣고 꼭 필요한 만큼 절제된 구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짜 먹는 멀미약이 아주 좋았어요)
꽃집에 가장 많이 주문이 들어오는 건 꽃다발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며 축하할 일들에 꽃을 준비할 때 가장 정석이거든요. 중요한 생일잔치나 전시회 등에 가야 하는 꽃바구니들과 달리 꽃다발은 조금 더 간결하고 포장을 푼 뒤 화병에 들어가 선물 받은 사람의 집을 며칠 동안 더 밝혀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물론 꽃바구니도 잘 관리해 준다면 더 오래가기도 해요. 하지만 나중에 남는 바구니와 플로랄폼이 좀 번거롭긴 합니다) 옥수와 한남의 경계에서, 아파트와 빌라들 속 묘하게 앉아 꽃집을 하다 보니 꽃다발을 주문하시는 사건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가장 많은 주문은 부부를 위한 꽃다발입니다. 여러 기념일들이나 가족행사를 위한 꽃다발들 주문이 가장 많아요. 그다음은 공연이나 전시를 위한 꽃다발입니다. 방금도 친구의 전시 마지막날을 환하게 밝혀 줄 노란 꽃다발을 만들어 건네드렸거든요. 그 외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나 여러 만남 자리에 꽃을 들고 가고 싶어 준비하는 꽃다발이 있습니다.
노랑을 좋아하는 친구의 전시회를 위한 꽃다발. 여름이 원망스러워 가을을 함께 담았다.
예약전화를 받으면 자주 남편/남자친구분들은 꽃 주문에 대한 대화를 어려워하세요. 어디 수산시장을 방문해 회를 골라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초점 없는 목소리와 불안한 톤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꽃집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엄청 떨렸어요. 예산은 어떻게 권해드려야 하는지, 매장에 지금 그 꽃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디자인을 권해드릴까, 그 예산은 너무 과하거나 너무 적은데 하는 생각들이 침착하려 내린 목소리 톤 사이로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이제 9개월을 꽉 채워가는 제가 느끼고 권해드리는 방법은 편안하게 상황과 생각을 설명해라 예요. 저는 예약을 받으면 생각하고 계시는 디자인이나 색갈이 있는지, 예산은 어느 정도인지 여쭤봅니다. 받으시는 분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은 그다음에 들으려 해요. 어렵고 중요한 얘기가 먼저 나온 뒤에 그걸 토대로 예약을 잡아가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예산과 디자인을 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황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기도 해서 그걸 토대로 예약을 잡습니다. 그럼에도 꽃은 주고 싶고, 예약과 상담은 너무 어렵다면 저는 언제, 누구에게, 왜 선물할 거고 좋아하는 디자인이나 색은 O/X이고 예산 얼마로 준비해 달라고 꽃집에 맡겨버리는 걸 권해드려요. 제 경우에는 명확한 주문은 그에 따라 충실히 만들려고 안전하고 예쁘게 준비하지만, 사장님이 알아서 예쁘게 해 주세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부담을 느끼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든요. 전애인을 만나러 가기 전이라는 말을 들은 미용사가 가장 힘을 내는 것처럼, 구체적 스토리를 조금 알려주신다면 더 이입해서 최고의 디자인을 위해 영혼을 쏟아붓습니다.
청첩장 모임을 위해 준비한 꽃다발,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을 모두 친구로 둔 꽃집 사장의 영혼과 부담스러움이 들어갔다
꽃은 결국 어느 정도는 기호식품 같은 영역일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자주 생각나는 삶의 요소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비싸기만 하다고 느낄 겁니다. 꽃 선물이 너무 어려우신 분들이 꽃집에 들르시게 된다면 제가 위에 적은 말이 도움이 되실 겁니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꽃집 사장님들은 언제나 주문과 칭찬에 목말라 있답니다.
ㆍ매장에서 제가 상담하는 걸 본 친구가 말이 너무 많아서 손님들 다 도망가겠다고 놀린 적이 있어요. 매장에 오셔서 꽃을 고르고, 꽃다발을 만든 뒤 포장해 나가는 시간이 30분 내외인데, 꽃다발 만들기 전에는 꽃다발에 대한 얘기를 하고 만드는 도중에는 작은 이야기로 적막을 채우다 보니 말이 많아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희 매장에는 빵빵한 매립형 스피커가 있어 음악도 잘 나오고, 조용히 의자에 앉는 분들께는 말을 걸지 않아요. (놀린 친구와 저는 MBTI가 E/I만 다릅니다.)
ㆍ종종 남성 손님들이 10만 원도 넘는 비싼 다발을 주문하신 뒤 리액션 없이 받아가시는 경우가 있어요. 다시 주문하시는 날까지 생각이 많아집니다. 가격이 가격인지라 마음엔 드셨는지, 후기는 어떠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ㆍ몇몇 남성 손님들의 최대 애정표현 중 하나는 계좌이체라는 걸 새롭게 깨닫습니다. 꽃다발을 받고 내리 담담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계좌이체 해드렸어요 하고 쿨하게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손가락 하트보다 더 큰 리액션을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