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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Aug 12. 2020

<중경삼림> 유통기한

Chungking Express_A film by Wong Kar-wai

모든 것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사랑도, 인생도, 이 세계도 언젠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의 운명은 끝을 맺는 것이니, 우리가 모든 새로운 시작들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이밍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시간이 갖는 그 복잡다단함을 한 마디로 종결시키는, 엄청나게 편리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당신과의 만남이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간에는 어떤 시간에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 있다. 그런 사라지고 지나쳐버린 시간들의 겹겹 사이로 역사가 흐르고, 흘러간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불행한 존재다. 흘러가 버린 것들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존재.


 
 

경찰 223이 집착하는 5월 1일 자 통조림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집착, 흘러가 버린 것들을 잡고 싶은 덧없는 욕망들. 통조림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면, 너와 나의 유통기한이 조금이라도 길어질까? 223은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같이 평범한 인간이다. 그가 초등학교 동창한테까지 전화를 걸며 지나가버린 시간 중 하나라도 돌이켜보려 부단히 애쓰는 모습은 웃음이 나오면서 애처롭다.  


 
 

대체 그 절묘한 타이밍이란 건 뭘까? 우연일까, 운명일까? 지나간 시간 중 하나도 되찾지 못하는 경찰 223은 술집으로 처음 들어온 사람과 사랑에 빠질 거라 결심한다. 그 결심과 동시에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는 223에게 운명이 된다. 반면 노랑머리에게 223은 단지 우연이다. 운명과 우연은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차이뿐이다. 결국 그놈의 타이밍이라는 것 역시 인간의 시간 중 일부인지라 흘러가버리는 것들 중 하나고, 그렇게 흘러갈 땐 막상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날, 유통기한을 확인하기 위해 통조림을 뒤집어 봤을 때 거기 그 날의 날짜가 적혀있을 뿐이다. 타이밍이라는 손쉬운 표현, 그 밉살스러운 단어가 주는 아쉬움은 후회로 우리를 짓누른다. 


 
 

그런데 경찰 663은 다르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통조림을 뒤집어보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경찰 223이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해 인지하고, 부정하고, 또 극복하려 이것저것 시도하는 동안, 663은 그저 마냥 서있을 뿐이다. 마치 스스로 유통기한을 지웠다 다시 쓰는 것처럼. 그의 멍청하고 지고지순한 로맨스는 당연히 가차 없이 버려진다. 감히 유통기한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듯. 그러는 사이 그에게 다가온 그놈의 또 다른 타이밍을 놓치는 건 덤이다.


 
 

이런 멍청한 남자가 홍콩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얼굴이 된 건 하나 덕분이다. 결말이다. (사실은 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과 그 순간의 양조위가 내는 완벽한 분위기 때문이겠지) 663과 페이는 타이밍을 그저 흘려보내버리고 마는 게 아닌 만들어낸다. 지나가버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아닌, 지나갔기 때문에 이제야 도달할 수 있는 시간에 다다른다. 지나간 시간이 전부 헛되지 않았다는 가장 완벽한 위로. 결말과 함께 눈물 지을 수밖에 없고, 이 영화 전체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홍콩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1997년, 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의 반환, 그 이전의 홍콩은 영화를 통해서나 겨우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왕가위의 푸른빛 시선으로 담은 필름 그레인 가득한 장면들로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는 또 다른 통조림과 같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릴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언제나 누구나 맛볼 수 있도록 품고 있다. 그 맛이 진짜와는 조금 다르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통조림을 열어 진짜와 같은 그리움을 만날 수 있다.


 
 

그리움은 끝이 있는 것들에 대한 헌사다. 기억은 사라지고 변화하고 퇴색된다. 더 이상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모든 시간들, 흘러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온전하지 못한 기억들. 그것이 곧 그리움이다. 중경삼림은 이제 그런 영화가 되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홍콩이라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 아니면 홍콩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언제든 다시 꺼내 주는 통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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