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영화를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Maudie - A film by Aisling Walsh
영화를 시각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일까? 영화의 장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일까? 마치 낭만주의 회화처럼 명확한 주제의식을 갖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극적인 장면들을 뜻하는 것인가? 화려한 영화미술로 빛과 구도를 장식하는 장면이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들 또한 관객들에게 어떤 관념을 전달하는 영화 미학의 일부고, 지금까지 수많은 스타일리스트들이 영화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영화는 순수한 회화와 다르게 시간의 특성을 갖고 있다. 두 시간 내내 화려함으로 점철된 장면만 본다면 아름답기보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화려한 장면은 시각적인 경험으로 이어질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근본적인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영화적인 체험으로 이끈다는 것은 영화가 가진 시간의 특성과 시각적 요건이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영화의 장면은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흐르고 움직인다. 여기에서 영화만의 독특한 체험을 찾을 수 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흐르는 장면은, 그렇기에 분명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이 존재한다. 그 두 지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에 의한 개화, 영상은 그것을 확실히 포착할 수 있고 그것만이 우리를 확실하게 영화적 체험으로 이끈다.
시간에 의한 개화는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작게는 하나의 테이크에서 배우의 얼굴이 그리는 미묘한 변화부터, 크게는 영화 전체가 이끌어내는 테이크와 테이크의 유기적인 연결, 이처럼 영화의 어디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시각적으로 이해하고자 첫걸음을 뗀 사람들에겐 그것을 예측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그저 마냥 바라만 보기엔, 그냥 실수로 카메라를 켜놓은 것 같은 롱테이크는 시간이 주는 변화고 뭐고 간에 졸릴 뿐이다. 그렇게 영화를 좀 더 심도 있게 바라보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방법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내 사랑’은 최적의 시작이다.
‘내 사랑’은 혼자서 불안을 껴안아야 했던 두 남녀가 그것을 서로의 존재로 대체하는 영화다. 에단 호크가 연기하는 에버렛의 작은 집에 샐리 호킨스가 연기하는 모드가 가정부로 찾아가며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무의미의 무게를 무던히 짊어지고 견디는 것이 삶인 남자 에버렛에게, 모드라는 다리를 저는 여자는 동등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그 열등함으로 오히려 자신의 불행을 상기시키는 존재다. 그런 반면, 모드는 자신이 가진 열등함과 불안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고 세상을 통해 그 미완을 승화하려는 인간이다. 매몰찬 부정과 차가운 현실에도 자신의 색채를 잃지 않는 모드에게 에버렛은 결국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준다.
이 과정은 단순히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모두 영화 내에서 완전히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에버렛의 작은 집은 에버렛 자신을 표상한다. 허름하고 더러워 가꿔진다는 꿈조차 꿔본 적 없는 작은 집은 에버렛의 지금까지의 삶이다. 작은 집처럼 에버렛의 삶과 육체는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지속될 뿐, 어떤 의미도 정서도 없다. 모드는 건강하고 풍부한 정신의 소유자지만 불완전한 육체에 갇혔다. 불완전한 육체는 그녀가 온전히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집의 부재로 표현된다. 그녀는 누구보다 풍부한 정신을 가졌지만 홀로 설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모드가 작은 집의 가정부로 들어오는 동시에 모드는 에버릿의 삶에 침범한다. 에버릿은 격렬하게 또 다른 불운이 자신의 삶에 침입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어느새 문은 열린다. 열린 문을 통해 작은 집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따뜻한 손길, 정서의 충족을 건네받는다. 모드가 정돈하기 시작한 집은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집의 모습을 갖춰간다. 에버렛의 삶도 그렇게 부정 속에 가둬 둔 자신을 모드의 정서를 빌어 세상에 적극적으로 편입시킨다.
이제 작은 집은 에버렛의 삶에서 모드와 에버렛의 관계로 표상을 달리한다. 작은 집에 모드가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 에버렛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부정하지만 마음의 한편을 내준 것과 같이 집의 한 구석에 그림을 그리는 걸 허용한다. 구석진 한켠에서 벽의 한 면, 바닥, 내부의 모든 면을 모드의 그림이 채워간다. 에버렛의 삶이라는 무의미의 공간이 모드의 따뜻한 마음으로 빠짐없이 채워진다. 모드는 에버렛의 삶의 편린이 아닌 에버렛의 정서로 자리매김한다. 튼튼한 에버렛의 육체(집)와 부드러운 모드의 정서(그림)가 더해지며, 결핍에 시달리던 둘은 하나로서 완전해진다.
에버렛은 모드에 의해 삶을 충족시키고, 모드는 에버렛에 의해 세상 위에 존재할 공간을 갖게 된다. 불완전한 둘은 서로에 의해 완전해진다. 그 과정이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계적인 이미지를 통해 누구라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게 그려진다. 이를 통해 영화가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