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살인> 배우의 얼굴, 인물의 내면
三度目の殺人 - A film by Kore-eda Hirokazu
처음 히로세 스즈의 얼굴을 본 것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본 소녀의 얼굴은 뭔가 달랐다. 이글거리는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눈, 단순히 예쁜 얼굴이 아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 그 무언가를 도저히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저 미지의 아름다움. 이 소녀는 엄청난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가 무언가를 클로즈 업하는 순간, 장면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게 된다. 피사체로 가득 찬 화면 속에서, 피사체는 단순한 객체에 머물지 않고 확실하고 명쾌한 시각적 제시물이 된다. 이렇게 무언가를 강조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이끌어내고 관객들을 장면에 몰입하게 만드는 클로즈업은, 쉽고 명료한 동기이자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영화가 시작된 이래 만들어진 가장 최초의 영화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담기 시작한다.
클로즈업을 통해 카메라에 가득 찬 무언가는, 물리적으로 봤을 때 단순히 피사체와의 거리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좁아진 거리를 통해 제한된 시선은 그저 나와 피사체의 거리를 좁히고 마는 게 아닌, 내가 피사체의 내부를 파고드게 만든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지속되는, 화면 속 살아 숨 쉬는 얼굴은 우리와 단순히 대면 작용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 전부를 관찰할 수 있도록 내비친다.
'세 번째 살인'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뛰어난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다른 방면으로 가장 특출 난 영화다. 다분히 형식적으로 제한시킨 스타일 때문인지 영화의 모든 숏이 끊임없이 관객에게 사유를 던진다(아니면 끊임없이 스스로 사유한다). 숏 하나하나가 단순히 시간을 채우거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려 만들어진 게 아닌, 영화라는 시간의 주름을 이어나가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특히 흥미로운 숏들은 미스미가 시게모리와 구치소 내에서 면회를 하는 장면들이다. 여기서 미스미와 시게모리는 유리벽에 가로막혀 있는데 대부분의 숏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둘을 전부 카메라에 담는다. 이럴 경우 카메라가 한쪽의 정면을 바라보고자 하면 유리벽 너머의 반대쪽은 생략되거나 유리벽을 포함한 뒷모습이 담기게 되는데, 이런 숏에서 시선을 빼앗는 건 그 뒷모습도, 카메라를 마주한 이의 얼굴도 아닌, 유리벽에 비친 미스미의 얼굴이다. 이때 우리는 시게모리와 변호사 동료들의 얼굴을 보면서 반대에 마주하고 앉은 미스미의 얼굴도 동시에 볼 수 있다. 어째서 미스미의 얼굴은 지속적으로 유리벽에 비치는가?
한편 카메라가 측면에서 미스미와 시게모리를 동시에 바라볼 때는 마치 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벽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둘은 유리벽이 가로막았을 때와 다르게 장면 내에서 서로를 완전히 타자로서 바라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유리벽은 미스미와 시게모리를 가로막는 게 아니다. 유리벽에 비친 미스미의 얼굴이 시게모리와 같은 방면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처럼, 오히려 유리벽은 두 캐릭터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치시킨다.
시게모리는 변호사라는 직무를 이유로 미스미와 진실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하고자 한다. 진실은 재판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며 주문처럼 외듯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게모리와 미스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도 시게모리의 그런 표면적인 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유리벽에 반사된 미스미의 얼굴이 비치는 것처럼, 어느새 시게모리는 실질적인 자신과 미스미의 진실을 완전히 동기화시키게 된다. 법정 추리물의 탈을 쓴 영화는 진행되는 모든 숏들로부터 미스미의 실제를 추측하는 동시에 시게모리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렇게 미스미는 시게모리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던 관념이나 감정을 현실에 실체화시키는 인물이 된다. 자신과 딸의 관계가 미스미와 사키에의 관계나 미스미와 미스미의 딸의 관계와 중첩되는 것처럼, 마치 미스미가 일부러 모호하게 시게모리를 은유하는 것처럼. 시게모리는 자신의 관념과 환경에 완전히 녹아들어 미스미에 자신을 대입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자신이 품고 있던 관념을 배신하지 않아야, 뚜렷한 진실이라는 부술 수 없는 껍데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진실이라는 허상을 통해 세 번째 살인을 이루어낸다.
'세 번째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의 얼굴이 중심을 이룬다. 모든 숏이 배우의 얼굴에 눈을 뗄 수 없게 구성돼있다. 마치 얼굴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존재하지도 않는 진실에 닿을 수 있는 것처럼 현혹한다. 미스미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의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적이다. 진실이란 없다는 걸 증명하듯 그릇처럼 비어있으면서도, 그런 부당한 세계에 대한 불 같은 분노를 끝없이 뿜어낸다. 부당한 세계에 있어 정의와 분노는 동일하다. 부당함을 마주했을 때 대체 그 속에서 정의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결국 내면 속에서 끓는 순수한 분노만이 인간이 외치는 표면적인 정의와 다를 것 없으며, 오직 그 분노만이 심판을 행할 수 있는 요건이 된다. 심판은 정의 따위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늘 그렇듯 부당함으로부터 시작돼 부당함으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무엇보다 가슴속에 깊이 남는 것은 사키에의 얼굴을 한 히로세 스즈다. 그녀의 얼굴은 한 없이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혀있다. 영화에서는 사키에가 다리를 저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유독 많이 잡힌다. 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비애는 사키에의 얼굴에 절망 대신 오직 무감만이 비치기 때문에 더욱 사무친다. 유일하게 진실이나 정의와 가까운 인물인 그녀가, 어떤 구원도 행할 수 없으며 어떤 구원도 받을 수 없는 피해자라는 사실은 더없이 냉혹하고 부당한 이 세계에 있어 유일한 진실이다. 부당한 세계에 있어 진실과 정의는 어떤 의미도 없기 때문에, 소녀는 헤아릴 수 없는 밤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