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s by Bong Joon-Ho
'기생충'은 여러모로 특별한 영화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어 영화일 것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외국어 영화이고, 처음으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한국어 영화라는 타이틀까지 쥐고 있다. 즉 영화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모든 수식을 곁들일 수 있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영화에서 어떤 특별한 경험을 갖지 못했을까? 먼저 설명해둬야 할 것은 '기생충' 이전에도 내가 봉준호의 작품에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그리고 '옥자'까지. 봉준호는 다작하는 감독이 아니며 장편 데뷔작을 제외하고는 전부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거두었으니, 많은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모두 봤을 것이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는 봉준호의 영화들을 보면서 한 번도 그 영화에서 느낀 감정을 남과 공유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마치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나서 같이 본 친구에게 토니 스타크의 마지막 핑거 스냅이 가져오는 뭉글뭉글한 벅차오름 밖에 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같다.
'살인의 추억'을 예로 들어보자. '살인의 추억'은 다분히 장르적 쾌속을 달린다. 봉준호와 김상경이 연기하는 두 형사가 각자의 성향을 비틀어가며 서로의 모습에 교차하기까지 내달리는 이 영화는,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어 하는 감정의 마중물을 통해 관객에게 장르적으로 효과적인 몰입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런 장르적 내달림 속에서 인간의 어떤 모습을 고찰해야 하며, 또 고찰할 수 있는가? 고찰은 여백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꽉 들어찬 치밀한 장면적 계산과 캐릭터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살인의 추억'은, 뻔하지만 재밌는 장르영화가 그렇듯 어떤 여백도 허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생충' 이전에 봉준호의 영화 중 가장 훌륭한 영화로 자주 꼽혀왔던 '마더'는 어떠한가? '마더'는 그래도 봉준호의 영화 중 비교적 여백을 많이 허용한 영화다. 하지만 이 여백은 김혜자와 원빈이 표현하는 제한적으로 정제된 캐릭터로부터 온다. 도준이 가진 순수한 악덕과 도준의 모가 갖는 부정한 애착은, 극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역동성이다. 극적인 정제에서 비롯되는 평면성에,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캐릭터들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카메라는 똑같이 계산표에 갇힌 연출을 반복한다. 처음 봤을 땐 흥미로웠던 장면과 장면들이, 장르적 쾌감을 이미 해소한 두 번째에는 전혀 흥미롭지 않아 진다. 장르적 쾌감과 함께 캐릭터가 가진 여백은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어떠한가? '기생충'은 이런 봉준호의 스타일, 그 첨단에 도달한 영화이며, 어떤 잘 만들어진 오브제 같은 영화다. 누가 이 영화에서 근세의 존재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근세의 존재는 흔히 말하는 봉준호가 자랑하는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어째서 기택의 네 가족이 모두 억지스럽게 박사장의 집에 안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근세가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은 박사장의 가정과 기택의 가정을 한 배경에 전부 등장시키면서 캐릭터를 개인단위가 아닌 가구 단위로 묶는다. 따라서 문광과 근세라는 부부 또한, 이 극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가구의 단위로 묶여야만 한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린 이야기는, 모든 우화들이 그러하듯 극에 등장하는 장치 또는 함정을 일일이 전부 밟아가며 그 끝에 도달한다. 다만 봉준호는 굳이 이런 어려운 형식을 만들면서도, 자신의 장기인 장르적 쾌감을 겹겹이 계산적으로 쌓는다. 그래서 복잡한 형식에도 설득력을 잃지 않고 관객 누구에게나 똑같이 불쾌하면서도 우스운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아쉬운 건, 캐릭터가 복합적인 장치로 만들어진 총체에 완벽히 종속되어 그 단편으로 작용하는, 이런 우화적인 형식을 취한 영화들이 전부 내게 매우 특별했기 때문이다. 특히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들이 이런 형식을 빌리는데, 그의 영화들이 가지는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다분히 장치적인 배경들은 이상한 광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봉준호의 연출과는 정반대인 엇박자로 이루어진 과도한 연출, 공백과 비약의 반복에서 온다. 오히려 복잡한 장치들로부터 오는 부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영화의 전체를 아우르는 불길한 기운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기운에 몸서리가 쳐지는, 장면과 장면이라는 총체를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봉준호의 연출은 너무도 계산적이고 너무도 정직하다. 비를 맞으며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기택의 가족들이 담긴 시퀀스는 다분히 뻔한 의도를 가진 너무도 정직하고 훌륭한 연출이다. 이것은 마치 '옥자'의 한 장면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붉은 옷을 입은 소녀를 오마주한 것과 비슷하다. 연출의 의도가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관객 스스로 쾌감을 만들어 낼 어떤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봉준호의 영화는 영화를 보면서 '이걸 이렇게 표현했구나' 라며 감탄하는 재미는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그것들을 총합했을 때 느껴져야 할 어떤 폭풍, 이야기 그 이상의 것이 없다. 결국 다분히 장르적인, 그것도 봉준호라는 특색 있는 장르를 또 한편 본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기생충'이 내게 어떤 특별한 경험도 주지 못한 것은, 봉준호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에서도 유독 단 하나의 장면만은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생일파티에서 인디언 분장을 한 기택의 마지막 표정이다. (사실 극 내내 나의 이목을 끈 유일한 것이 송강호라는 엄청난 배우가 만들어낸 무표정한 분노이다) 이 장면만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완전하고 아름다운 빈틈을 남긴다. 도대체 그의 얼굴이 드러내는 감정은 무엇인가?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가? 나는 '기생충'을 보고 나서 오직 기택의 이 마지막 표정만이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