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야구장과 오락실에서

by 박소현

회사 일로 마음이 잔뜩 지쳐 있었다. 그동안 야근을 많이 했다고 우리 연차로 이틀을 쉬게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있어 오전에 출근을 했다. 대표는 내가 출근하는지도 몰랐을텐데 아침부터 일을 시켰다. 출근하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처리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남편지역으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또 일 업무가 오길래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너무 났다.

하루 종일 쌓인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고, 아무도 내 편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그냥 욕이라도 내뱉으며 속을 뻥 뚫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곳이 없었다. 집에서는 참아야 했고, 회사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꽉 막힌 하루 끝에,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밖에 좀 나가자.”

늦은 저녁, 나를 아무도 모르는 도시 도심의 불빛이 유리창마다 비쳐 반짝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뜨겁고 불안했다. 그렇게 아무 목적 없이 걷다가 우연히 스크린 야구장을 보았다.


문을 여는 순간, 가격표가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좀 가격이 나갔다. 너무 길게 치자니 체력이 힘들고 같고 감질맛 나게 치고 싶었다. 30분 코스로 했다. 여자 직원에게 고무줄이 없는지 묻고 머리를 질끈 묻고 칠 준비를 했다. 남편이 먼저 들어갔고 나는 밖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초록색 바닥과 LED 스크린 속 가상의 야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스피커에서 공이 날아가는 ‘슝—’ 소리와 ‘탕!’ 하는 타격음이 번갈아 울렸다. 그 리듬이 이상하게도 내 심장 박동과 맞았다. 순간 ‘저기서 한 방 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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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잡는 방망이였다. 레이디 단계라 마음이 조금 편했다. 부스 안은 따뜻했고, 은은한 인조 잔디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앞에는 스크린이 있었다. 오로지 나와 공, 그리고 배트뿐인 작은 세계였다.

처음 공이 날아올 때는 너무 무서웠다. 공이 생각보다 빨리 왔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흰 공에 놀라 방망이를 허공에 헛휘둘렀다. ‘내가 이걸 칠 수 있을까?’ 불안이 스쳤다. 그러나 몇 번 헛스윙을 하다 보니 어느새 공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았다.

공이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이 움츠러들면 안 된다. 공이 오기 전부터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배에 힘을 주고, 공이 날아오기 전부터 예측하며 기다렸다.

스크린에 비친 가상의 투수처럼 나도 자세를 맞추고 배에 힘을 줬다. 타격음과 동시에 팔을 휘두렸다. 야구 방망이와 공이 맞았다. “탕!” 소리와 함께 공이 화면을 뚫고 날아갔다. 스크린 위로 붉은 글씨가 번쩍였다. HOME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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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도 모르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건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내 감정을 정화시키는 주문 같았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그날 두 번째 홈런을 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이 고르게 쉬어졌다. 스크린 너머의 가짜 야구장이 어느새 진짜 내 마음속 풍경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사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공이 매섭게 날라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칠 준비를 해야 한다. 미리 마음을 다잡고, 예측하며 다가 올 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마음 컨트롤을 해야 한다.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되니까. 제일 중요한건 태도. 자신 있게 휘둘러야 한다는 걸 야구를 통해 배웠다.

야구장을 나설 때, 내 어깨는 처음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걸로 끝내기 아쉬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 덜 풀린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 곳이 바로 근처의 오락실이었다.


문을 열자 인형뽑기가 눈에 보였고, 철권, 동전 노래방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현금 만원을 다 바꿨다. 그전에는 오락실 가도 철권 게임만 하고 나왔는데 이번에 갔을 때는 노래방, 펌프를 즐기다 왔다. 처음 한 게임은 펌프였다.

화면에 화살표가 번쩍이고, 리듬이 울렸다. 처음 해보는 거나 다름없었는데, 발이 리듬을 따라가자 어느새 온몸이 음악과 하나가 되었다. 춤추는 것처럼 즐겨야지 하며 홍진영의 〈잘가라〉가 오락실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잘가라 잘가 회사야—’라는 말을 속으로 하며 다다닥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완전히 비었다. 회사 일도, 억울했던 대화도,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도 다 사라졌다. 남은 건 심장의 박동과 음악의 리듬뿐이었다.

사운드가 너무 커서 내 숨소리도 묻혔고,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오직 나의 리듬, 나의 분노, 나의 에너지만 존재했다. 몇 곡을 연달아 뛰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하지만 그 땀이 이상하게 후련했다. ‘이게 진짜 해방이구나.’ 그렇게 펌프를 마치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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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노래방에 들어갔다. 노래를 잘하지 못하지만, 오늘은 그냥 부르고 싶었다. 트로트를 부르고 싶었다. 내가 사실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몰라를 그전에는 눈치가 보여서 안 불렀는데 이번에는 과감히 불렀다. 그 가사가 내가 부를 때 마음에 콕 와닿았다. “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만큼 나를 위로 해주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야구장에서 치고, 오락실에서 밟고, 노래방에서 외치는 그 모든 행위는 결국 같은 흐름이었다. 억눌린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연습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미세하게 단내가 섞여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야구장과 오락실은 단순한 오락 공간이 아니라, 감정을 안전하게 터뜨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회 속에서, 일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버텨야 한다’는 말에 갇혀 산다. 하지만 때로는 욕을 하고, 크게 소리치며, 공을 때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런 행위들이 우리를 지켜준다.


앞으로도 똑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마음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

감정을 버릴 곳을 만들어야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스크린 야구장에서의 홈런, 오락실의 리듬, 노래방의 외침—

그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내 안의 평화를 되찾는 ‘나만의 해방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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