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비가 와서 아파트 창문에는 내 허리만큼 빗물 자국이 남아있었고, 지금도 비가 오는지 유리창 너머 밑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빨간 우산을 쓴 주민이 총총히 걷고 있었다.
버티컬 커튼을 제치고 문을 여니, ROTC 초급장교 시절 경기도 파평산 아래 1사단 브라보 포대 BOQ에서 잠을 자다가 기상나팔 소리에 깨어 창문을 살짝 열며 느꼈던 축축한 그런 비 냄새가 났다.
오늘 서울은 영상 2도인데, 그때 그곳은 더 추웠겠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삼삼오오 연병장으로 향하던 장병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 그 시절이 그리워라!
아침을 먹고, 카톡을 보니 동작 빠른 몇몇 친구들이 날씨 얘기로 한창이었다. 경기도 양평에 사는 친구 W는 눈이 오는 앞마당 사진과 뛰어노는 강아지 동영상을 찍어 보내왔다.
"서울은 이슬비가 오는데, 그곳은 함박눈이 내리네!"
다음 글을 읽으니, 서울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고 하였다. 멀지 않은 동네에 사는 다른 친구가 모르는 척하며 눈이 내리는 그곳이 어디냐며 얘기하니, 방금 비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좁은 땅덩어리에 날씨가 변화무쌍하네!"
조금 있으니 멀리 경기도 포천에 사는 친구도 펄펄 눈 내리는 동영상을 보내주었고, 충남 천안에 사는 친구 Y는 그것을 보고 "옛날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네... 아름다운 설경에 빠지다!"라는 답글과 눈사람 이모티콘까지 보내왔다.
그것을 보니, 작년 12월 초에 양평 W네 집에서 친구 8명이 모였을 때, Y가 준비한 빨간 모자와 머플러를 모두 쓰고 X- Mas캐럴을 불렀던 모습이 떠오른다. 즐거웠던 그때를 회상하니 겨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이에 질세라, 나도 수년 전에 강원랜드 하이원리조트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과 여행기를 단톡에 올려 추억을 불살렸다.
그때 오랜 친구들 5명이 1박 2일로 놀러 갔는데, 새벽 2시까지 얘기하다가 잠들 무렵 베란다에 나가보니, 오후 내내 주룩주룩 내렸던 비는 어느새 하얀 눈으로 변해 내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서울은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목련꽃으로 봄날이었는데, 4월 1일인데도 그때 그곳은 설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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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병원일에 바빠서 경황이 없던 친구 L이 최근에 광화문 S교회 대학시절의 사진과 자료를 모아 기념 화보집을 발간한다고 하여, 책장과 창고를 뒤져 카톡으로 전달하며 일조했다.
앨범을 보면서 풋풋했던 내 청춘을 회상했고, 혼자 보기가 아까워 청평 새터 호반, 수원 원천유원지, 두 번씩이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 올라 찍었던 사진 등 15장을 보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대학 1학년 겨울 수양회 때 눈 덮인 산정호수를 배경으로 남녀 친구 6명이 나란히 붙어 찍은 사진이었다.
모범생 L의 댄디한 모습과 다른 친구들의 싱그러운 표정도 좋았지만,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키가 큰 J가 하얀 비니를 쓰고 무리 한가운데 끼어 머리를 90도 기울여 찍은 코믹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아마 지금 그런 자세를 취한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더욱 압권인 것은 선배들의 추억 어린 흑백사진이었다.
우리처럼 컬러시대가 아닌, 선배들의 빛바랜 사진들은 복고풍이어서 이지적으로 보였고, 불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지만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 남선배들의 패션과 스타일을 보면 대체로 중후했는데, 반대로 여선배들은 감기약 판피린 모델처럼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귀여워 보였다.
L이 주관하는 S교회 찬양대 단톡방에는 우리가 막내인데, 그들 선배들은 70세 언저리에 있거나, 몇 분은 75세가 훌쩍 넘어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오늘 아침부터 친구들과 차가운 비부터 포근한 눈까지 봄을 얘기하였고, 옛 사진을 보며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을 상기하니 마음이 울적해지며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