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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Apr 03. 2022

나의 화양연화를 위하여

나의 화양연화를 위하여

코로나19가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감염경로를 추적해 번호를 매겼고, 확진자는 주홍글씨처럼 평생 죄지은 양 숨어 지냈던 때가 불과 2년 전이었는데 내 주변을 보니 거의 반이 확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확진되지 않는 사람은 대인관계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는데, 나도 확진 대열에 끼었고 1주일 근신하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더구나 모친에 이어 내가 이틀 차이로 자가 격리하니 근 열흘간 좁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곤욕이어서 빨리 해제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아무튼 해제 통보를 받자마자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집을 나왔고, 무작정 전철을 타고 경기도 문산으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들은 그 며칠 사이에 연두색이 완연했고, 아파트에서 수시로 내려다보았던 목련과 산수유는 만개하였으며, 길가에 벚꽃도 조금씩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와! 얼마 만에 가는 건가!  


작년 가을 파주에 있는 유명 가구공장에 식탁 의자를 수리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 결혼할 때 구입한 의자가 너무 낡아 고쳤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왕복 배달비도 개당 2만 원이라 바람도 쐴 겸해서 직접 차에 싣고 다녔다.


그때 누런 들녘을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니, 반쯤 연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행복이었고,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다가 쉬엄쉬엄 마시는 캔커피는 여유였다.


아주 오래전 초급장교 시절 푸른 제복을 입고 통일로를 누볐는데 이렇게 나이 들어 청운의 꿈을 품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가보게 되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서 그때 그렇게 가슴이 뭉클했던가!


오늘 나는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려고 또 문산에 간 것이다.


전철이 서울 시내를 벗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파스텔톤 파란 하늘은 물론, 개나리, 진달래 등 봄맞이 꽃단장을 하고 있는 산과 들까지 온통 나를 반겼고, 금촌을 지나니 금방 내 젊은 시절  2년간 국방의 의무를 다했던 1사단 관할지역인 문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풀려고 심심찮게 갔던 그곳이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눈만 돌리면 보였던 군인들도 드물어 여기가 판문점, 임진각과 인접한 군사지역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현역 시절 17 포병대대 단골 술집이었던 문산 17번지 치킨집 주변을 물끄러니 쳐다본 후에 나는 분위기 좋은 카페로 들어갔다.


아!  이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30여분 커피를 마신 후에, 나는 문산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9710 버스를 탔다.


버스는 전철보다도 확실히 낭만적이었다. 봄볕이 내려쬐는 창가에 앉아 1970년대 히트 가요를 들으니 싱그러운 20대 시절로 돌아갔고, 노랫말 하나하나가 너무 정겨워 내 가슴을 흠뻑 적셨다.


끝이 없는 길(박인희), 편지(어니언스)도 좋았지만, 금과 은이 부른 노래 '빗속을 둘이서'는 언제 들어도 너무 감미로웠다.


"이 빗속을 걸어갈까요.

둘이서 말없이 갈까요.

아무도 없는 여기서 저 돌담 끝까지

다정스러운 너와 내가 손잡고"


이곡의 마지막은 화려한 칼라사진이 아니라 나에게는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흑백사진이었고, 그것도 언젠가 옅게 바래지는 아스라한 실루엣이었다. 그 당시 청춘남녀들은 모두  로맨티시스트였고, 이 노래는 그들의 순수했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서정시였다!


더구나 현경과 영애가 노래한 '그리워라'를 들으면 첫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이별이 떠오르는데,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애잔해지며, 숨이 멈춰질 것 같다.


"햇빛 따스한 아침 숲 속 길을 걸어가네

당신과 둘이 마주 걸었던 이 정든 사잇길을

보랏빛 꽃잎 위에 당신 얼굴 웃고 있네

손 내밀어 만져보려니 어느새 사라졌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 날들

꽃잎에 새겨진 사랑의 이야기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 날들

지금도 내 가슴에 꽃비가 내리네"


낙엽 지는 가을도 아니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인데, 나이를 먹으면 남자는 여성호르몬이 많아져 센티멘탈해진다고 하는데 나만 유독 심한가!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노래 가사에 얽힌 사연을 음미하니 첫사랑 그녀를 만나 헤어질 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추억이 되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버스를 타는 내내 들었던 포크송과 발라드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심금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한때는 나를 침묵시켰고, 감동을 주었던 그 노래들은 지금도 나를 즉시 청춘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인가!


누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는지, 언제가 좋았는지 물었을 때,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 결혼, 주택구입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많아 나는 현재가 좋다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다.


더구나 진정한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열심히 만들어가고 있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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