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라면 맹목적으로 끌리는 내게 그보다 더 매력적인 이유는 없다. 처음 그의 그림을 접했을 때, 마치 소설 삽화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어두운 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와 남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피에로는 왜 저런 차림으로 있는 걸까? 여자의 손에 쥐어진 쪽지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이런 호기심들이 그냥 지나치려던 내 어깨를 턱 잡는다.
나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인 로런스 블록은 아주 재미난 시도를 했다.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집을 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개인 단편집은 아니다. 스티븐 킹을 비롯한 열일곱 명의 작가들이 함께한 작업이다. 방법은 이렇다. 작가들에게 호퍼의 그림을 한 점씩 겹치지 않게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하나씩 써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묶여 나온 책이 <빛 혹은 그림자>다. 호퍼의 그림을 정확히 표현한 제목이다. 그것들은 온통 빛과 그림자로 대비를 이룬다. 그래서 강렬하다. 조명과 햇빛으로 더 강한 빛을, 그리고 그 빛과 물체가 이루는 그림자를 캔버스에 균형 있게 표현한다. 그런데 왜 <빛과 그림자>가 아닌 <빛 혹은 그림자>였을까? 그건 매 순간 빛 혹은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때문일 것이다. 빛과 그림자 모두를 갖는 게 아니라 빛 아니면 그림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인생의 선택지. 그것이 호퍼가 표현하고 싶었던 시간의 양면성이 아니었을까.
그 양면성엔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그걸 알려면 내가 둘 중 어느 쪽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빛 안에 들어가 있다면 그림자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림자 안에 들어가 있다면 빛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선팅되어있는 차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바깥에서 차 안을 보면 조도가 낮아진 차 안이 잘 안 보이고, 차 안에서는 조도가 높은 바깥이 잘 보인다.
내가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 들어가 있었던 시간은 2009년이었다. 미국을 뒤흔든 경제 위기 속에 깡통주택이 된 첫 집이 그들이 말하는 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심지어 사업체마저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더니. 건물주는 큰 프렌차이즈 마켓과 계약하기 위해 건물이 통째로 필요했고, 그로 인해 우리를 비롯한 몇 개의 사업체들은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우리 부부의 전 재산을 날린 셈이었다. 집이 숏세일로 넘어가 작은 타운하우스로 급하게 이사했다. 그리고 3주 후에 셋째 아이를 낳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번듯한 자기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들, 잘 되는 사업체를 가진 사람들, 아이들을 다 키우고 여유롭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환한 빛 속에서 그 빛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자신이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것 같았다. 추운 밤, 난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창문으로 들여다본 그들의 집엔 넉넉한 식탁 위 음식들과 따뜻한 벽난로, 선물이 가득 놓인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그들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난 어두운 밤, 그림자 속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겐 세 개의 성냥개비조차 없는 것 같았다. 성냥개비라도 있었다면 잠깐씩이지만 빛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금방 사라질 꿈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빛에 들어가 있을 때, 그림자를 잘 돌아보지 않는다. 빛을 보고 서 있으면 뒤에 생긴 그림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림자 속에 있을 땐 또 다른 그림자 속 사람들을 더 잘 볼 수 있다. 통증과 눈물에 더 예민해진다. 밤에 기침이 더 심해지는 노인처럼, 밤에 열이 더 심하게 오르는 아이처럼.
하지만 누구나 빛 속에서만 서 있을 수 없다. 그 말은 항상 그림자 안에서만 서 있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빛은 오전엔 여기를 비추다가 오후엔 저기를 비춘다. 따라서 그림자도 이쪽에 있다가 저쪽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그림자가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 테니 그 순리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된다.
내 시간의 장면들이 그림으로 벽에 걸린다. 때론 빛, 때론 그림자에 들어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는다. 그리고 언젠가 완성될 나만의 단편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를 기대해 본다. 그러기 위해 난 오늘도 시간의 선택지 위에 선다. 이야기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