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공감 능력을 찾아서 – 내 안의
한스 로슬링의 '팩트 풀니스'를 읽고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공감 능력을 찾아서 – 내 안의 ‘간극 본능’ 이해하기
나는 엄마와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편이다. 엄마와 대화를 할 때면 항상 배워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논리의 빈틈을 찾아내기도 하고, 내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들을 하나둘씩 깨닫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은, 특히 자기만의 삶을 구축한 엄마와 같은 어른과의 진솔한 대화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에게 지혜를 더해주는 일이다.
최근에 나는 엄마와 페미니즘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00년생 21살 대학생 남자인 나, 71년생 50세 전업주부 여성인 엄마. 지금껏 살아온, 그리고 또 살아갈 시대와 환경이 다른 둘이기에 어쩌면 생각의 차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꽃다운 나이에 군대 2년 동안 가는 거, 이런 건 차별이 아니야? 내 대학 여자 동기들은 그 시기에 교환학생이다 뭐다 해서 가는데. 그리고 또 혜화역 시위 사진들 봐 엄마. 남혐이 장난 아냐.”
이번엔 빈틈이 없었다.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엄마의 말에 납득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분명 그러했다. 나는 엄마도 어느 정도 동의할 거라 예상했고, 엄마는 정말 ‘어느 정도만’ 동의했다.
“그래, 남자만 군대 가는 게 차별일 수 있어. 근데 여자는 애를 낳잖아. 아이를 낳아 평생 자식을 기르는 것. 그건 남자 애들이 스무 살 초반에 군대 2년 다녀오는 것보다 인생에 있어 더 큰 제약이라 생각해. 엄마 봐. 너희 기르느라고 일도 그만뒀고, 이빨도 부러지고 몸 성한 곳 없다, 얘.”
힘든 내색 없이 시부모님을 모셔오고, 아빠에게는 좋은 아내로, 나에겐 좋은 엄마로 살아온 엄마. 가정을 꾸린 반평생 동안 고생한 엄마를 보며 자란 내가 달리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물론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세상에 극단적인 사람들뿐이니? 그런 사람들에게 반감이 들 수 있지만, 여성의 권리 신장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 않겠니?”
나는 아차 싶었다. 그렇지. ‘간극 본능’. 최근에 읽은 『팩트 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이 세상을 오해하는 인간의 본능 중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장 강렬한 본능이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로슬링에 따르면, ‘간극 본능’이란 세상을 ‘진보와 보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양극단으로 나눠 파악하려는 본능이다. 그 간극에 수많은 사람, 수많은 사고방식과 생활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페미니스트는 적, 우리 20대 남성들은 무고한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내가 ‘본능적으로 극단적인 예에 끌리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쏟아내는 남성에 대한 혐오적인 발언과 행동들에 발끈하며, 내 속에선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할 것이다’라는 일종의 반감을 조금씩 키워왔다.
또, 나는 그러한 반감을 정당화하는 정보들만 선택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읽은 SNS 자료, 남초 커뮤니티의 ‘반페미’ 관련 자료,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까지. 나의 반감을 분노와 혐오로 이끄는 자료들은, 아니 분노와 혐오를 조장하기 위한 자료들은 인터넷에 넘치고도 넘쳤다. 나는 그 속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렸고, 그들에 대한 이유 있는, ‘합리적인’ 분노만이 남았다.
인터넷에는 세상을 둘로 나누려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그 사고를 담는 언어들이 가득하다. ‘탈페미는 지능순’, ‘한남충’과 같은 단어는 “세상을 둘로 나누고 상대를 대화와 합의의 대상보다는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보게 한다(윤석만, 2020).”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저들’을 구분하는 진영 논리는 강화된다. 나아가 나의 진영에 유리한 정보들을 취사선택하기 시작하며, 오직 나의 진영만이 합리적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인간의 ‘간극 본능’에 아주 부합하는 행동이라,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하려 애쓰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어렵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간극 본능’에서 벗어나 연대와 공감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이 ‘간극 본능’을 지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해법은 간극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여 대화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은 넷상에서 익명의 힘을 빌려 대화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다.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얼굴을 붉힌 모습을 보여야 하기도 하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겸허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의 매력이다. 선택적으로 학습된 자기 진영의 논리만을 배설하고, 그것이 논리적으로 공격받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나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결국,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서는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깊게 대화하자. 타인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는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 나 역시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페미니스트의 논리를 완전히 납득하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엄마가 증언하는 엄마의 삶을 통해 나는 몰랐던 여성의 삶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고, 극단이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속에 자란, ‘혐오’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 나의 본능이 나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공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