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다는 것보다 하필, 타이밍이 야속했다. 제주도 여행을 딱 하루 남긴 시점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실, 여행을 못 가는 것은 아이들과 다른 가족에게 미안할 뿐 스스로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을 줄 알았다. 평소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출근하면 하루에도 최소 100명 이상의 학생들을 만났고, 교무실은 항상 시끌벅적했고, 퇴근을 해도 세 아이들과 육아를 도와주시는 시부모님이 계셨다.
4년 터울로 출산과 육아를 거듭하면서 10년 이상, 1박 2일이라도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거나 해방 일지를 찍지 못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상이겠지만, 워킹맘으로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번아웃이 찾아오고 불평이 생겼다.
끝없는 육아와 일, 대학원, 글쓰기... 모든 게 다 버겁고 귀찮아서 혼자만 있고 싶은 열망이 올라오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격리를 당하게 되었으니 혼자 시간을 보낼 좋은 기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만의 자유시간인가!(ISFP는 이시간에 충전이 된다)
드디어 가족들은 떠나고 빈 집에 남았다.
서서히 38도까지 열이 오르고 온몸이 쑤셨다. 목이 얼마나 부어오르는지, "바늘 100개로 찌르는 고통"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란 걸 알았다.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끊임없이 천둥 번개가 쳤다. 자유는커녕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다. (강남이 침수된, 그날 밤이었다.)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은데 혼자 저녁을 챙겨 먹고, 혼자 약을 먹고, 혼자 적막함을 견뎌야 했다. 매일 고대하던 "혼자"의 시간이 왔는데,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던아이들이 너무 생각났다.
막내딸이 옆에서 재잘거리며 앞니 빠진 이를 드러낸 채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따뜻한 보리차를 갖다 주던 큰아이의 모습도 생각나고, 지금 옆에 있다면 가장 많이 안부를 물어 줄 세심한 둘째도 생각났다. 인기척 없는 집이 낯설고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덕분에 나는 오랜 기간 외로움을 몰랐다. 항상 시끄럽고 바빴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건강했기 때문에 건강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도 한참 잊고 있었다.
매일 혼자 살아가는 분들, 아픈 몸으로 혼자 지내시는 분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몸이 계속 아프니까 나도 모르게 성경 말씀을 찾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평소에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에 코로나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것이다.
4일째가 되니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서 오랜만에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수업준비도 하고 책도 읽었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생활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그동안 편한 자리에만 있으려고 하지는 않았나 돌아보기도 했다. 특히, 현승원이라는 크리스천 영어강사(교육자, 기업가) 유튜브가큰 깨달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