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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Feb 09. 2022

어쩌다 삼시 세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집밥이 되어주었다

슬기로운 집콕 생활


집콕 생활이 두 달을 넘어 세 달째 접어들고 있다. 지난해 12월 백신 패스 정책이 실시되고 난 후, 나의 모든 외부 활동은 정지되었다. 커피숍은 원래 잘 안 갔으니 별 영향이 없었지만, 자주 점심 외식을 하던 것도 멈추고, 아들과의 박물관, 미술관 등 체험활동과 여행도 멈추고, 고객을 만나는 일도 남편의 몫이 되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근처 마트에 다닐 때만 외출을 했다. 운영하는 매장은 어차피 남편이 담당하고 있고, 나는 온라인으로 일을 하고 있으므로 크게 불편한 일은 없었다.


 비접종자인 나로서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평온한 마음으로 집콕 생활을 받아들였다. 짜증은 내어서 무얼 하며, 불평불만을 해서는 무엇하겠는가. 언젠가는 전 국민이 웃으며 얘기할 과거가 될 것인데. 나라는 인간. 변화된 환경에 귀신처럼 적응하는 카멜레온 킴 아니더냐. 음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오늘의 썰을 풀어볼까 한다.



백신 패스 시행 , 오전 일과가 끝나면 주로 점심은 외식으로 해결했고 나의 컨디션이 괜찮으면 집에서 밥을 해먹기도 했었다. 비율은 8:2 정도. 주말에는 친정아버지와 동생네 가족들이 즐겨 찾는 횟집에서 저녁도 먹고 한잔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아들이 가끔 파스타를 먹고 싶어 하면 단골 파스타집에서  끼를 때우기도 했고, 좋아하는 분식점에서 꼬마김밥을  먹기도 했다. 외식  좋아했는데 쩝ㅎㅎ



부끄럽지만 요. 알. 못입니다.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시작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도, 출산을  후에도 계속 맞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요리를 제대로 배워  적이 없다. 코로나 전에는   시까지 자영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가끔 뭔가를 시도해 보려고 시어머니께 레시피를 전수받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만들었지만 , 맛없는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배가 고파 살기 위해 먹는 듯한 남편의 표정을 보면서, '밥은 그냥  먹든지 너님이 해서 드시구요. 그냥 나는 내가 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게요'. 마음먹었다.

요리는 다음 생에 시도해 보는걸로~~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겨우 김치찌개, 미역국 정도만 끓여 먹고살았다. 김치찌개는 시어머니 김치가 다했고, 미역국은 소고기와 후추가 다했으니 별 기술이 필요 없는, 요리라고 할 것도 못 되는 수준의 음식들만이 나의 영역이었다. 김치는 물론이고 웬만한 밑반찬들을 전부 시댁에서 가져다 먹었으므로 시어머니 아니면 우리 식구는 달걀 프라이만 먹고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백신 패스라는 정부 지침은 요. 알. 못인 나에게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선물해 주었다. 삼시세끼 집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나에게 닥쳐온 것이다. 잠깐이라도 시어머니 동네로 이사를 갈까? 생각도 해봤으나 현실적으로 불가했다. 그리고,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덥석 시댁 가까이 다가가는 거 아니라는 걸 며느리 선배님들께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허해져야 했다. 세상을 향해 분노로 경직된 어깨에 힘을 풀어내고 잔뜩 충혈된 눈동자의 핏발도 걷어내고, 재택근무라는 어깨의 짐도 내려놓았다.


가족의 삼시  끼를 책임지는 
숭고한 손가락에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불어넣어 
단전까지 따뜻해지는 
집밥의 세계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더니 무서울게 없어졌다.


"동태탕 먹고 싶다, 어디가 맛집이더라" 하며 검색창을 먼저 열었던 내가


"동태탕이 먹고 싶네, 어떻게 끓이는 거지? 재료는 뭐가 필요하지? 레시피 좀 찾아볼까? "


"아들아 파스타 먹고 싶니??? 토마토 파스타? 크림 파스타? 아님 로제?? "


"파스타 너~~~ 너 넌 너!!!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이걸 여태 그 비싼 돈을 주고 사 먹었던 거야???"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할렐루야!!!


너튜브 선생님과 수만 개의 집밥 레시피가 있으니 AI 시어머니 장착 완료로 나의 자신감은   대방출되었다.


두 달 동안 신들린 듯 음식을 해 댔다. 그동안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레시피들에게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만개의 레시피에 지나지 않았으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음식이 되어주었다.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고등어조림, 토마토파스타, 해물파스타, 알리오 올리오, 피자, 떡갈비, 떡만둣국 등등. 남들에겐 일상 집 반찬 일지 모르나, 나에겐 사 먹는 음식이지 해 먹는 음식이 아니었던 메뉴들이다.



집밥에 야식, 술안주까지 이제는  먹기보다  먹는  쉬운 요리 모드가 나에게도 "업글" 되었다. 심지어 맛도 있다. 내가 했는데도 맛이 있다니. 식당을 하시는 시어머니 음식에 길들여진 남편은  음식 칭찬에 매우 인색한 편인데, 그냥반도 엄지 !   보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공기를 싹싹 비워가며 어머니가 해주신 맛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니 요리가 점점  재밌어진다. 이기 머선 129!!


쉰둥이가 되고서 겨우 집밥을 제대로 해 먹을 줄 알게 되었다. 인스턴트 햄이나 통조림, 배달음식이 아닌 내가 요리한 음식으로 밥을 먹게 되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자꾸 동생네 식구를 불러 밥을 먹인다. 나눠 먹어도 창피하지 않을 음식을 만들게 된 것이 어마 무시하게 뿌듯하긴 한가보다.






삼시세끼 집밥을 하면서 알게 된 진실.


1. 재료가 싱싱해야 한다.

2. 모든 음식은 양념의 비율이 중요하다.

3. 육류나 어류의 경우 잡내 제거가 맛의 핵심이다.

4. 레시피는 언제나 있어왔다. 마음이 없었을 뿐. 


삼만 년에 한 번씩 요리하던 시절에는 냉장고에 싱싱한 재료들이 없었다. 사다 놓고서도 늘 바빠서 해먹지를 않으니 썩어서 버리는 게 더 많았다. 시들시들 해진 야채, 유통기한이 다된 어묵이나 두부, 오래되어 쩐내가 나는 참기름. 뭐 이런 애들로 실력도 없는 사람이 요리 흉내를 냈으니 맛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한마디로 냉장고 회전율이 좋아야 한다. 빨리빨리 소진돼서 항상 신선한 야채들과 각종 양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잡내 제거의 개념조차 몰랐던 때의 나는 돼지고기든 소고기든 내가 한 고기 요리는 먹지 않았다. 고기에서 나는 그 특유의 잡내가 싫었고, 나는 비건 체질이라 예민한 탓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미역국을 끓일 때 조차도 고기의 핏기를 빼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생선 조림할 때 맛술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약고추장을 만들어 두었다 요리조리 활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나이 쉰이 돼서야 요리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그저 재능이 없고 소질이 없고 그냥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살림보다 돈 버는 능력이 탁월(?)해서 죽을 때까지 내손으로 집밥을 해 먹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니 말이다. 정부의 지침이 한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별일 아닐 수 도 있으나, 나는 참으로 뿌듯 대견 뭐 그렇다. ㅎㅎㅎ



요리를 하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긴다.


앞치마.

하루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는 사람에게 앞치마는 교복이나 다름없더라. 그래서 방수되고 디자인도 이쁜 앞치마에 자꾸 눈길이 간다. 꽤 비싸더군.


중식도.

요린이가 욕심도 많지~ 하겠지만. 칼이 잘 안 드니 파 하나 써는데도 톱질 수준으로 갈아댄다. 샥샥샥 촵촵촵. 잘 잘라지고 잘 다져지는 요리용 주방 칼이 갖고 싶어졌다. 널찍한 나무 도마와 함께.


각종 조리 도구들. 

집에서 동그랑땡까지 해 먹다 보니 두부를 으깨는 그 도구(이름을 모르겠다)도 필요하고, 두부의 수분을 제거할 때 감싸는 포, 그거 뭐더라 그것도 이름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헝겊도 있어야겠고. 피자도 가위로 자르려니 불편해서 피자 칼도 사고 싶고 ㅎㅎㅎㅎ 별~~


냉동고.

파스타와 탕거리에 필요한 각종 냉동 해물, 육수를 내기 위해 필요한 각종 건어물과 냉동 만두, 시어머니가 주신 떡, 각종 견과류, 언제 먹게 될지 모르는 마라탕 육수, 내가 너무나 애정 하는 타고와사비 대용량 등 요리 필수 재료를 냉동 보관할 냉동 전용 냉동고가 필요하다.



생전 없던 주방도구 욕심이 갈수록 커져서 고민이다. 주방도구만 욕심내면 다행인데.

이제 슬슬   주방이 있는 “ 욕심이 난다.


나는 이렇게 백신 패스 정책을 자양분 삼아 본의 아니게스리. 심신의 수련과 재능의 발견으로 가족의 삼시 세끼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일하러 나가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여 이 시국이 빨리 끝나서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철없는 망아지처럼 훨훨 쏘다니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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