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공지능이 출동하면 어떨까?
22년 전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엄청나게 히트를 쳤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대박 히트를 치며 한류의 시작을 알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My Sassy Girl’입니다. ‘엽기적인’을 'Sassy'라는 영어 단어로 바꿨습니다. Sassy는 건방지다는 뜻이지만, 톡톡 튀고 멋지다는 의미도 있어서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엽기적인’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만 보면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엽기적’은 영어로는 bizarre라는 단어에 대응되고 아주 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 뒤에는 종종 따라오는 단어가 있는데, 그건 바로 '살인'입니다. 엽기적인 살인사건, bizarre murder case는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모두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살인사건이 아닌 토막살인이나 밀실에서 죽어서 증거가 없다던지, 이렇듯 호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엽기적인'이라는 말에는 애초에 귀엽다거나 튄다거나 멋지다는 의미는 없고, 아주 비상식적이고 괴이해서 토 나올 거 같은 두렵고 이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까지는 이런 의미로만 쓰였습니다.
그런데 90년대에 PC통신이 발달하면서 이 단어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도 90년대에 이 단어를 자주 썼습니다. PC통신을 할 때 그냥 아무 데나 이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게 당시로서는 재밌었습니다.
“그것 참 엽기적이군”
“넌 참 엽기적이야”
90년대 초에 PC통신으로 채팅할 때 이런 식으로들 많이 썼었는데, 사실 그때는 나중에 이 단어가 그렇게까지 유행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쯤에 PC통신 전성기가 되자,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90년대 말에는 유행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엽기적인 그녀도 원작은 PC통신 글입니다.) 급기야 2000년대 초엔 엽기적인 그녀, 엽기토끼 등 엽기라는 말이 우리나라 사회 전체의 문화코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쯤에는 이미 본래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고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진 셈입니다.
이런 당시의 우리나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엽기’라는 단어를 제대로 번역하기 힘듭니다. ‘엽기적인 그녀’의 영문 제목은 영화사에서 정한 것이겠지만, 직역을 하지 않고 나름 영화 내용에 맞게 잘 번역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엔 엽기라는 말을 예전처럼 잘 쓰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다시 옛날 본래 의미로 돌아간 셈입니다. 이렇듯 단어의 의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기에, 번역을 할 때는 단순히 사전적 의미뿐 아니라 이런 문화적 상황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기존의 번역기의 번역이 어색한 이유는, 사전적 의미에만 의존해서 문화적인 상황과 문맥의 맥락은 고려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번역기의 이상한 번역도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즘 인공지능은 이런 문화적 코드나 유행어까지 캐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Bing chat'의 경우,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검색해서 문맥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도합니다. 이렇다 보니, 상당히 정확히 번역할 뿐 아니라, 왜 그렇게 번역해야 하는지까지도 알려줍니다.
능숙한 번역가나 통역사가 번역을 해 주듯이, 인공지능이 정확히 통번역을 해 주는 시대도 이제 눈앞에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