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l unforgiver - 지구, 환경, 동물권 향상에 기여하려고
전 지구적 환경운동에 동참하면서, 동물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실제로 만나 대화하고 식사한 사람들은 본업이 국회의원이거나, 정부기관 산하의 직원이거나, 독서논술 교사이거나, IT 개발자이거나, 어느 기업에 속해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학부생과 중학교에 다니는 미성년자, 일용직을 하다가 잠시 쉬는 중인 무직자도 있었다. 사회 곳곳에서 다른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여 지구와 환경과 동물에 관한 마음을 꺼내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나누는 모습이 나에게 대단히 이상적으로 보였다.
지구가 가진 고유의 푸름과 동물이 가진 순수한 맑음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한 사람들의 연대는 사회 어느 곳보다 여리고 투명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장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어떻게 이 ‘판’에 진입하게 됐는지 얘기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일정 파트가 있다. 생명이야말로 ‘마음’이 가 닿는 지점이라는 것.
계기와 동기 간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론적으로 자연과 동·생물에서 사랑과 조화로움을 실감하는 순간순간이 쌓여 관련한 분야의 크고 작은 일들에 몰두하게 되고, 모임에 참여해서 사람을 만나는 순환으로 이어진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과는 또 다른 감동. 평소에 혼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심정들을 같이 있는 자리에서 오픈할 수 있다. 더하여 공동의 목표를 위해 아이디어를 내며 같이 행동·실천하기도 하고, 이러한 사이클이 시너지로 승화되어 크고 작은 파동들이 연거푸 일어나기도 한다.
동물의 권리 향상과 지구,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에 나는 막 대학을 졸업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중이었다. 잘하는 일을 하면 당장 먹고 살 수 있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매일 웃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웃음을 보장하는 고정 요소엔 계좌 잔고라는 게 있다는 걸을 조금 늦게 알았다) 하루하루 웃음이 고팠던 나는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거다.
만약 나에게 금전적으로 챙겨야 하는 가족 구성원이라거나 혹은 생계를 막막하게 누르는 빚이 당시에 있었다면 불가능했던 선택일지 모른다. 웃은 기억이 많이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기 땜에 돈보다 마음의 여유 그리고 미소가 훨씬 가치 높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마저 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하지만, 당시엔 웃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소리를 내 웃는다)
Moral unforgiver
졸업 후 얼마간 함께한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에 있던 단어다 - 용서하지 않지만 복수하지 않는.
스티븐 파인먼의 책 ‘복수의 심리학’ 중 일부이다. (반니 출판)
... 피해자에 따라서는 원통한 마음을 활동으로 풀면서 용서와 복수를 모두 비켜 가기도 한다. 예컨대 본인이 강한 학대를 유발하는 사회적 인자를 없애고 사회 여건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도의상 용서하지 않는 사람(moral unforgiver)’이라 할 수 있다.
무언가 가슴에 맺힌 게 있지만 용서도 복수도 하지 않으며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내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 안 가는 면이 없잖았는데, 위 구절을 만나며 ‘나 같은’ 사람을 정의하는 용어가 저기 어디 있었다는 사실에 신기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이도 저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기엔) 너무 가치로운 선택을 해왔다는 것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안도’됐었다.
그랬다, 지구와 환경 그리고 동물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정말로 진심으로 가치로운 업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대상이 다른 무엇으로도 되겠지만, 사회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에 내 움직임을 쏟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일인지.
경제와 경영을 전공하면서 어떻게 국가와 기업과 개인이 유기해 상호 협력하는지, 일정 패턴 하에서 그 논리를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에 노력했었다. 진짜 내가 관심 있던 것은 정해진 규칙이 아니더라도 있는 그 자체로 존중하고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제야 곰곰이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