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마지막 기억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면 정상적인 아빠의 모습보다는 술에 취해있는 모습이 더 많았다.
술에 취해있던 아빠에 대한 기억은 한둘이 아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0년여 년이 흘렀지만 난 그것을 '추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은 그 남자에게도 나에게도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내 아빠는 본능적인 '너스레'가 있는 남자였다.
허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너스레를 적지 않게 떠는 실없는 남자였다.
실없는 남자답지 않게 욱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슴 한편에 언제나 '화火'를 품고 있는 남자였다.
그 화의 대상은 내가 되기도 다른 가족이 되기도 혹은 집안의 집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가슴 한편에는 '고독'을 가진 남자였다.
노래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의 일에 오지랖 떠는 것을 좋아하는 실없는 아저씨였지만 그는 언제나 고독했던 것 같다.
그의 고독과 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서 떠나간 내 엄마의 선택을 나는 존중한다. 아니, 그 선택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던 그 남자와 여자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내 아빠는 항상 폭음을 했다.
110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나라를 잃었을 때도 그렇게 술을 마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순간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술을 마셔 없앴고, 더 이상 마실 술이 없을 때는 술을 구해오는 남자였다.
어린 시절 나가 가장 큰 두려움 중에 하나는 우리 아빠가 더 이상 마실 술이 없게 됐을 때 엄마가 화장을 하던 방에 있던 아세톤을 마시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극심한 알코올 중독자는 술이 없는 상황이 오면 매니큐어를 지우는 용도로 가정집에 하나씩은 있던 아세톤을 마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교실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고 의자에는 가시방석이 깔린 듯 불편했다. 그 이후 나는 항상 혹시나 하는 그 일을 두려워했고 엄마가 이미 떠난 방의 아세톤을 항상 화장실 변기에 버리곤 했다.
항상 술에 취해 있던 이 남자가 가장 고독한 순간은 자신의 의지를 몸의 방어 기능이 결국 이겨내고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만든 순간이었다.
몇 번의 구토와 극심한 두통을 보내고 나서 더 이상 물을 포함한 그 무엇도 삼킬 수 없게 되었을 때 남자는 가만히 앉은 채 멍하니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은 이 세상 누구보다 외롭고 고독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날의 감정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고모의 전화에 나는 급하게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핸들을 돌렸다.
'아빠가 지금 돌아가신다니?'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아니면 아직 숨은 붙어있지만 곧 돌아가신다는 말인가?
도대체 지금 돌아가신다는 말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고모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먼저 병원에 도착해있던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초보운전자였고 직장과 다른 지역에 있는 아빠에게 가는 건 기술적으로 어려웠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조차 낯설었던 나에게 고속도로 주행은 너무 힘든 것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전화를 받고 가는 길이라면 더욱.
내 차는 300만 원짜리 중고차였다.
내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운전수'로 규정했다.
트럭을 운전하던 레미콘(트럭믹서)을 운전하던 본인의 승용차를 운전하던 본인이 운전하는 행위 자체로 자신을 규정했다.
아빠는 아들이 차를 산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운전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들이 자신처럼 운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운전을 했다.
60km 정도의 거리.
내비게이션이 없어서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켰지만 휴대폰 거치대조차 없었기에 허벅다리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중간중간 확인을 하며 운전을 했다.
4월 아직은 선선한 계절이지만,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몸을 타고 흐르는 이 물이 땀인지 눈물인지 헷갈렸다.
'제발..'
마음속으로도 입으로도 그 말만 반복했다.
마치 영원히 이어져있을 것 같던 고속도로도 끝이 보였다.
병원 주차장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병원 정문 입구 근처에 차를 정지(그건 주차가 아니었다.) 시켜놓고 달려간 암병동,
엘리베이터가 아빠의 병실에 가까워질수록 두렵게 느껴졌고 모든 감정, 모든 공기가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그렇게 빨리 달려오고 싶었던 아빠의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피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이윽고 엘리베이터는 아빠가 있는 7층에 도착했고, 익숙한 병실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 안 쪽으로 오히려 무덤덤하게 걸어 들어간 내 눈앞에 보인 건 코에 호스를 꼽고 힘 없이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얼굴의 모든 근육에 힘이 풀려있는 아빠의 얼굴은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시간이 2주인지 20년인지 헷갈리게 했다.
헷갈렸다. 아빠는 돌아가신 건가? 고모들과 누나는 울기만 할 뿐 아무도 내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진 않았다. 결과부터 말하면 아빠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아빠는 풀려버린 근육에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고모와 누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의 간호사가 들어와서 아빠의 여러 가지를 점검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저씨로 불렸던 쉰세 살의 우리 아빠는 그 간호사에게는 '할아버지'였다. 그 호칭이 나를 상당히 불쾌하게 만들었고 누나는 그 말에 더 눈물을 흘렸다. 그 단어에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을 의아해하던 지나치게 순진하고 당차 보이는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병실을 나갔다.
아빠는 곧바로 의식을 되찾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고독했던 우리 집안 최고의 폭군은 폐위廢位 준비하고 있었다.
숨 쉬는 것을 무척 힘들어하던 아빠에게 무슨 장치인지 입에 물고 호흡할 수 있는 도구를 가져온 간호사의 옆으로 돌아누워달라는 간호사의 요구에 아빠는 불쾌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에레기랄, 메롱이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떠났다.
병원으로 향하던 내 전화기로 아빠가 정말 돌아가신다는 연락이 왔고,
택시를 타고 도착한 병실에서 아빠는 눈을 뜬 채,
의식이 떠나고 있었다.
사실 의식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참내, 드라마 같지 않구나..' 어이가 없었다. 내 아빠가 이렇게 죽는다니.
내 아빠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많은 남자였고, 어쩌면 영원히 살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환갑이 되기도 전, 그럴듯한 한마디 말도 없이, 맹장이 터져서 찾은 병원에서 퇴원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이렇게 떠났다.
25년을 아빠와 살았다.
군대, 자취로 따로 산 시간도 몇 년 되지만 그때도 아빠는 살았다.
근데 난 지금 아빠가 사라졌다.
죽도록 미웠던 아빠였다.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던 때도 있었다.
10년이 지났고, 나는 아직도 그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아빠가 사라질 아들에게 뭔가 해줄 말은 없었을까?'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웹툰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각자의'프라임 세포'가 존재했다.
가장 힘이 세고, 그 사람을 상징하는 세포.
우리 아빠의 프라임 세포는 '너스레 세포'였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아빠는 마지막으로 농담을 던졌다.
나는 아직도 아빠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내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와닿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힘없는 호랑이의 모습도
고통스러워하던 환자의 모습도 아닌,
너스레를 떨던 그 남자다.
내가 닮고 싶은 아빠의 마지막 모습.
그 모습만 기억하고 싶다.
"에레기랄, 메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