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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백설기 Feb 20. 2024

내 인생의 햇볕

나를 살리는 추억에세이 쓰기. #7

겨울이 드디어 끝나가는 걸까. 외근이 있을 때마다 몰래 바짓단 속에 신고 나갔던 발목 토시를 오늘 드디어 두고 나왔다. 점심에 토시를 차지 않은 채 외부에 나갔는데 쌀쌀하지만 할랑한 게 기분이 좋았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는 겨울이 되면 갖가지 방한 용품들을 챙긴다. 목도리와 장갑은 기본이고, 유니클로의 히트텍 상하의, 옷에 붙이는 핫팩, 손에 쥐는 핫팩, 바지 속 스타킹 위에 덧신는 발목 토시, 뒷머리를 둘러 양쪽 귀를 덮어주는 일명 귀도리까지.


겨울에 가장 일이 많고 밖에 나갈 일도 많은 직장 인지라 겨울을 나려면 어쩔 수 없다.


그중 발목 토시는 내복을 입지 않고도 다리를 보호할 수 있는 나의 최애템이 되었다. 의자에 앉았을 때 발목으로 삐져나오지 않아야 해서 최대한 무릎까지 끌어올려 신어야 한다. 또 바지가 울퉁불퉁해지면 안 되니 최대한 얇은 것으로 사야 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이 지겨운 방한용품들로부터 벗어나는 이 때 가장 그리운 것은 다름 아닌 햇볕이다.


햇볕을 자주 쬐어야 잠도 잘 오고 비타민D도 몸속에 합성돼서 갱년기에 좋다고 다들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햇볕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겨울에는 해뜨기 전 일어나 해가 뜰 무렵 출근을 해서 건물 안에 있다가 해가 지면 컴컴한 길을 돌아와 집의 불을 켜는 일상이 반복된다.


어쩌다 외부에 나가도 두꺼운 점퍼에 뭐든 칭칭 동여맨 나는, 이모의 계략(?)으로 가방에 넣을 옷을 잔뜩 껴입고 할아버지 집에 맡겨지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뒤뚱거리다 후다닥 뛰어 들어갈 뿐이다.


햇볕을 만나지 못하는 이 겨울이 드디어 끝나가는 지금, 내 기억에 남은 찬란한 햇볕들을 조심스럽게 소환해본다. 봄을 지탱하여 겨울을 나듯이 내 맘 속 어딘가에서 나의 수많은 겨울들을 지켜주었던 그 볕들을 말이다.


갑자기 창이 환해진다.      


내가 기억하는 어엿한 첫 번째 우리 집은 큰 길에 닿아있는 일명 길갓집이었다. 나무에 유리를 끼운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면 잡다한 살림들을 놓았던 시멘트 바닥 공간이 있었고, 왼쪽에는 바로 안방이 있었다. 안방 문은 내 엉덩이쯤 높이에 있어서 신발을 벗고 흐엉차 올라섰던 기억이 난다.     


일곱 살 되던 해의 3월 말, 입학식이 한참 지나서야 학교에 입학한 나는 모든 게 더디고 굼떴다. 기다란 출석부를 들고 들어오는 여선생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면 내 이름이 나올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대답하곤 했다.


떠든다는 이유로 남자아이를 발로 차기도 했던 선생님의 노란 슬리퍼가 무서워 시장에 가면 노란 슬리퍼만 찾아서 쳐다봤던 생각도 난다.


선생님이 유일하게 무섭지 않은 시간은 음악 시간이었다. 코흘리개 교과서에 있는 동요라 봐야 “나리 나리 개나리~” “퐁당퐁당~”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같은 단순한 멜로디였다.


짧은 노래일망정 어김없이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나오는데 목청껏 따라 부르다 보면 높은 음계에서 목소리가 위로 뻗어나가며 기분이 좋아졌다. 뱃속 어디선가 뿌듯한 느낌이 올라오면서 드디어 어엿한 학생이 된 자랑스러움마저 들었다.


그 날도 음악 시간이 있었던 날이었나 보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보이지 않았다. 안방 옆에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던져놓고 거울 앞에 선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표정을 한껏 다듬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 손을 맞잡고 아래위로 흔들며 두어 곡을 연달아 불렀다. 마치 학교 아이들이 구경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이며 온갖 예쁜 척을 다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창가를 보니 아빠 얼굴이 밑에서 쑥 올라왔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다가 내 노랫소리가 들리자 창문 밑에 숨어 있다가 “야. 잘한다.”하고 박수를 친 것이다.


 “아. 깜짝이야.”


창문이 열려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노래를 불러 제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끄러움도 잠시 내 눈에 가득 들어온 것은 아빠의 웃는 얼굴 뒤로 햇살에 노랗게 빛을 발하던 개나리였다. 선생님의 슬리퍼와는 전혀 다른 노란 빛.


아빠가 창가를 떠나 집으로 들어오던 그 짧은 시간, 작은 창가를 가득 덮었던 소담스런 햇볕과 샛노란 개나리. 이번엔 뱃속이 아닌 가슴 속 깊은 곳이 살짝 간지러웠다. 그리고 나른함이 밀려왔다. 행복이었다.  


해마다 집 앞 홍제천 옆에 가장 먼저 피어나는 개나리 군락들을 볼 때마다 오래전 봄날 노랗게 물든 한 낮의 햇볕을 떠올렸다. 행복은 그렇게 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모 역시 세월 속에서 순간에 머문다는 것을 애틋하게 되새기곤 했다.  


몇 년 전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어린 조카를 만난 날, 팔순이 다 된 아빠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야, 잘한다.”


가슴 속이 뭉클하며 간지러웠다.


햇볕을 이야기하자면 우리 오빠와의 백마강 슈퍼맨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백마강둑 밑 동네에 살던 우리에겐 가까운 이웃이 있었으니 벽돌공장을 하시던 이모부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안티푸라민과 벽장, 눈깔사탕이 먼저 기억난다. 강둑 아래 벽돌공장의 사장님이었던 할아버지 덕에 오빠와 나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동네아이들과 둑과 공장을 오르내리며 놀았다.


그날은 드디어 보자기를 가져가 슈퍼맨이 되는 날. 보자기를 목에 동여맨 내가 늠름하게 강둑 위에 섰다. 강둑 옆에는 벽돌을 만드는 모래가 작은 산을 이루어 쌓여있었다.


우리는 거기로 용감하게 하늘을 날아 떨어질 참이었다. 둑 밑을 내려다보니 그날따라 모래가 아득히 아래로 보였다. 그사이 누가 퍼간 것일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가 쓰는 보자기를 매일 갖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슈퍼맨~~”.


오빠의 힘찬 구령에 맞춰 나는 용감하게 하늘을 날았다. 어? 너무 오래 난다는 생각이 들며 ‘푹’ 소리가 나더니 모든 게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기절을 한 것이다.


웅성웅성 소리가 나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모래 위에 사뿐히 놓여있는 개똥이었다.


엎어져서 기절한 나는 슈퍼맨의 용맹을 잊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는데 짧은 순간에도 개똥 위로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으로 여겨졌다. 보자기를 두르고 개똥을 덮친 나를 오빠 친구들이 봤다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으랴.   


모래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알알이 그토록 고왔더냐. 낮 동안 햇살이 익혀준 모래가 그토록 따뜻한 지도 처음 알았다. 놀란 오빠가 나를 향해 달려와 걱정을 하는 소리와 몸짓도 나는 따뜻했다. 마치 큰 사고라도 당한 양 수선스럽게 집으로 업혀가던 어린 날의 쨍한 햇빛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후 새우깡을 사러 가던 내가 집 앞에서 미끄러졌을 때 쏜살같이 달려와 나를 업어가던 그 순간 나는 진짜 슈퍼맨은 오빠라고 생각했다.


빠는 음악에서든 언어에서든 기이할 정도로 슈퍼맨다운 구석이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슈퍼맨의 출발지는 그 날의  강둑이었다.  


아주 가끔 인터넷 지도에서 내가 살던 동네와 강둑을 보며 그 높이를 가늠해보곤 했다. 지난 여름 집에 내려갔을 때 감사하게도 강둑과 벽돌공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또 한 번 보자기를 두르고 강둑에서 뛰어 그 선한 햇볕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또 뛰어내릴 것이다. 물론 이젠 투신자용 안전매트가 깔려야 할 것이다. 아, 개똥은 없어도 된다.    

(왼쪽부터)외삼촌할아버지 함용배 님, 필자, 필자의 아빠 심재문 님. 멀리 둑 위에 차렷자세로 서있는 아이가 필자의 오빠라는 사실이, 이 글을 올리고서야 밝혀졌다. 남매는 4년 여후 저 둑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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