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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May 18. 2021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번역가

공포 영화를 보면 인류애 차오르는 번역가

전 공포 영화 좋아해요


나의 고백에 대표님 - 회사 말고 부업 쪽 - 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몸서리를 치신다. 공포영화, 그 단어 만으로 끔찍한 무언가가 떠오른 모양이다. 아니면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끔찍했나? 에이,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내 주위의 많은 번역가가 공포 영화를 싫어한다. 별로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싫어한다. 깜짝 놀라는 게 싫다는 이유는 납득할 수 있는데, 귀신, 좀비, 악마가 싫다고 하면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저도 귀신, 좀비, 악마를 좋아하진 않아요. 그리고 공포 영화란 보통은 그들을 물리치는 내용이라고요. 아니, 설마 귀신이 좋아서 공포 영화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 이미지 무엇, 인생 무엇.


우리의 직업: 번역가라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번역 일감 중 공포 영화가 제일 좋다. 공포 영화는 짧으니까! 전에 한 독일 좀비 영화는 영화 전체의 대사가 300줄뿐이었다. 태국 좀비 영화도 그쯤 됐다. 좀비조차 말을 해서 구구절절 말이 많은 일본 좀비 영화도 900줄 내외였다. 잠깐, 혹시 나 좀비 영화 전문 번역가? 아무튼, 흠흠. 보통 90분짜리 영화는 1000줄, 많을 땐 1500줄의 대사를 번역해야 하는데 공포영화는 그 반도 안 된다. 번역료는 같다. 이 꿀을 대체 왜 싫어한단말인가.


하지만 내가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대체적으로 공포 영화의 스토리 진행은 아주 창의적인 데다가 문제 해결 방식에는 인류애가 충만하고 결말은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공포 영화의 경우 이러한 사건은 주인공의 상실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소중한 누군가가 죽거나, 애착을 갖고 있던 공간을 떠나 새로운 - 굳이 전재산을 털어서 산, 낡고 으스스하며 숨겨진 다락방 및 지하실과 기분 나쁜 이웃이 있는 - 집으로 이사 가거나. 마음에 구멍이 생긴 주인공은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금기된 것에 손댄다. 공포 영화를 욕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 자체가 다 완벽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어벤져스였으면 인류 반을 없애서 진정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게 해 준 타노스 장갑 그렇게 안 썼음. 3000만큼 이해 안 돼. 그러고 보니 전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빌런이 타노스라며? 조커일 줄 알았다. 이 시국인 만큼 그 마음은 알 것 같기는 하다. 조커는 마스크를 안 쓰잖아. 흠, 그럼 베인이 제일 사랑받아야 하는 건 아닐지. 앗, 또 딴소리.


본격적으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할 때부터는 감독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의 평범한 현실을 잠식하는 공포를 표현하기 위해 공포 영화의 감독들은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소들로 무언가 있는 듯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창조해낸다. 특히나 <컨저링> 시리즈의 제임스 완 감독이 이걸 참 잘한다. <컨저링>에서의 박수나 <인시디어스>에서의 유모차는 영화를 보다가 절로 감탄을 내지를 정도였다. 와, 정말, 정말 대박이다, 어쩜 저 아이템을 저렇게 쓴다니. 얘, 수완아 너는 증말 뭐가 돼도 될 애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6월에 개봉하는 <컨저링 3: 악마가 시켰다>를 모두 봐주세요. 워너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싶지만 받지는 않았고 그냥 기대 중. 


하지만 공포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런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다. 주인공은 사악한 존재를 무찌르고 일상을 되찾으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상처 받았던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외면했던 주변의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붙잡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도움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주인공을 위협하던 존재는 사라진다. 참으로 감동적이다.


나는 공포 영화의 큰 줄기가 인간이 상처와 허무를 극복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비슷한 플롯의 무서운 이야기가 입으로, 책으로, 영상 매체로 전해져 온 것은 단순히 우리를 무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어떤 상처도 아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분위기 [서프라이즈]...


마음에 빈자리가 생기면 나쁜 무언가가 거기에 들어차기 쉽다. 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악마도 무찌를 수 있다. 이렇듯 공포 영화에는 마음이 지친 사람을 위한 위로가 담겨있다. 아마도? 혹시 지금 너무 힘든 분이 있다면 공포 영화를 보세요. 잔뜩 긴장하면서 보면 살도 빠진다네요.


그래서 난 살인마가 나오는 슬래셔 무비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의 사악함은 별로 즐기고 싶지 않기에. 그리구 너무 징그렁. 난 곱창도 별로 안 조아한단 말이얌.




이 날, 공포 영화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공포 영화 번역 의뢰를 받았다. 역시 뭐든 말하고 봐야 한다.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에 흔치 않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꿀을 계속 혼자서 즐길 수 있게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도 드는 나는 욕심쟁이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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