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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Jun 03. 2021

아카데미를 다녀야 번역가가 될 수 있나요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번역가

나는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다녔다. 졸업하지는 않았다. 중간에 회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상 번역 아카데미가 쓸모없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았다. 어쨌든 거기서 배운 기술을 써먹고 있으며, 거기서 맺은 인연이 나의 소중한 거래처 중 하나가 됐다.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아도 번역가가 될 수 있다. 열심히 이력서를 돌리거나 해외 사이트에서부터 일을 받는다거나 혹은 인맥으로 번역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는 전문가지만 또 그렇게 허들이 높은 것은 아니어서 관심을 갖고 조금만 뛰어보면 의외로 쉽게 일을 구할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요즘처럼 일이 많은 경우에는 더더욱. 웰컴웰컴, 번역이 많아요, 번역이 많아.


하지만 이건 중간 과정을 대폭 생략한 설명이다. '관심을 갖고'라는 말은 내가 독학으로 영상 번역 세계에 대해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선배 번역가의 책을 읽는다거나, 영상 번역가들의 블로그를 보면서 적당히 감은 잡을 수 있지만, 관련 기술은 결국 맨몸으로 익혀야 한다. 배움이 빠른 사람이라면 업체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니라면? 어떤 프로그램을 써야 하는지부터 - 이게 의외로 다양하다 - CPS란 무엇인지, 번역만 하면 되는데 프레임은 왜 신경 쓰는지 같은 부분도 눈치코치로 캐치해야 한다. 오, 라임이 제법 괜찮군. 눈치코치캐치. 이마저도 내가 아는 부분만 말한 거다. 새로운 업체를 만나면 새로운 업무방식과 새로운 가이드가 온다.


'조금만 뛰어보면'이란 말을 풀어쓰면 '(영화사, 벤더사, 에이전시에 이력서를 보내고 업데이트하고 수많은 거절과 무응답과 테스트 탈락을 이겨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조금만 뛰어보면'이 된다. 이 과정에서 번역료를 제대로 계산받지 못하거나, 아예 번역료를 못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면 번역가 되려다가 떼 먹힌 번역료 받는 법을 공부하고 로스쿨 가는 거다. 사실 로스쿨 조금 끌린다. 다들 살면서 한 번은 이의 있습니다! 를 외쳐보고 싶잖아?


나는 ENTJ. 지옥에서 올라온 계획형 인간이다. 앗, 갑자기 mbti는 왜 말하죠? 과몰입이신가요? 그냥 알파벳 네 글자로 제가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인간인 걸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계획형 인간은 다이어리가 있고 달력이 있고 메모 앱 캘린더를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실행력은 괜찮아도 추진력은 형편없다. 나는 돌다리가 있으면 두들기는 정도가 아니라 물에 빠졌을 때, 돌다리가 흔들릴 때, 알고 보니 돌이 아닐 때의 경우를 나누어 플랜을 마련해놓고 건너는 사람이다. 아니면 그냥 누군가가 그 위에 멋진 철근 다리를 세워주기를 기다리든가. 그리고 철근 다리 시공사를 찾아보겠지.


꼼꼼함이 지나치면 소심함이 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소심해서 꼼꼼해진 걸까.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소심하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를 다 찾아보고 백업 플랜을 세워야만 하는 성격이다. 여행 가기 전에 여행 카페에서 '망했어요'를 키워드로 검색하고, 비행기 타기 전에는 비행기 사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타입. 이런 내가 맨몸으로 영상 번역을 독학하고 이력서를 돌렸다면, 이력서가 거절당했을 때, 이력서가 응답이 오지 않았을 때와 기타 등등의 경우를 전부 상상만 하다가 역시 번역은 나랑 안 맞는다며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영상 번역 아카데미에 관해서는 여러 말이 있다. 누군가는 아카데미가 별로라고 하고, 누군가는 졸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아카데미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이 모든 의견은 다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니까 사실 어느 한쪽이 맞다고 하기는 힘들다. 결국 황희 정승이 되어야 한다. 허허, 네 말도 옳구나. 나는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았으니, 졸업하지 않아도 번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내 조언을 듣는 사람이 미리 영화 업계와 연을 맺어놓고 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그냥 무책임한 조언이 되겠지. 번역가 그거 그냥 열심히 하다 보면 돼요^^ 일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럼 구해봐야죠. 열심히 구하면 돼요^^


경험은 제쳐두고 성격으로 따져보자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게 영상 번역 아카데미는 꽤나 안락한 편인 것 같기는 하다. 특히 졸업 후 일감이 연결되는 에이전시가 있는 아카데미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발버둥 치지 않아도 선배들이 알아서 번역에 관한 기술을 알려주고, 과제로 제출한 내 번역물을 보면서 상냥한 피드백도 준다. 프로그램 사용법과 팁도 알려준다. 졸업하면 수업을 들으며 함께 한 동기들이 같이 에이전시로 이어지니까 공동 작업도 한결 부담 없고, 이력서를 돌리지 않아도 이력에 한 줄 한 줄 번역 작품이 추가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장르도 다양하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단점은 역시 돈이랄까. 최소 2단계, 많으면 3-4단계로 이어지는 영상 번역 아카데미의 수업은 취업 준비생이나 잠시 일을 쉬고 영상 번역으로의 전직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부담되는 금액이기는 하다. 심지어 초반에는 그렇게 일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어서 투자한 수강료를 번역으로 회수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기껏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돈이 안 벌린다고 번역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끈기가 없는 게 아니다. 시간과 기타 등등 조건을 치밀하게 계산해 나온 결과다.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꼭 다녀야 할까. 혹은 영상 번역 아카데미는 정말 낭비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 누구도 명확히 바로 이 길이 진정한 번역가의 길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다만 영상 번역 아카데미의 수업은 생활 교양이 아닌 직업 교육인 만큼,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성향을 더해 생각해보면 방향이 보일지도 모른다. 왜 개인 사업이 잘 맞는 사람이 있고 사기업이 맞는 사람이 있고 공기업이 맞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카데미는 어느 쪽이냐면 공무원이겠지. 소중하고 작은 번역료. 하지만 나름 안정적.


질문을 바꿔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다닌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아뇨.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흠... 꽤 만족? 혼자서 준비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번역가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는 아카데미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래서 꽤 만족합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사람에게 배우는 게 많은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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