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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Aug 04. 2023

혼자 떠난 치앙마이에서
부처를 만났다

떠나는 직장인 | 치앙마이 여행기

공황이 왔다. 갑작스럽지만, 아주 뜻밖이지는 않게. 매일매일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한 불안감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나로 사는 게 지겨워졌고, 일본에 가고 캐나다에 가던 언제나의 나답게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간다면 이 불안이 조금은 괜찮아질 거란 기대를 품었다. 너무 화려한 도시는 외로울 것 같았고, 너무 한가한 도시는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았다. 적당히 볼거리도 있고 마음대로 쉴 수도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생각도 못 한 도시가 떠올랐다. 치앙마이에 가야겠어. 


평이 좋은 호텔을 일찍 예약했지만 항공 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 상태는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이 즈음해서는 의욕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서 먹는 것도 귀찮았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항공 대기가 풀렸다. '확정이신가요?' 여행사 직원의 말에 확정이라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지만 목요일 오후에 난 인천공항에 있었다. 40분이나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치앙마이는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태국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인구는 적어 한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서 치안도 좋아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나 한 달 살기의 인기 목적지로 뽑힌다. 늦은 밤에 도착한 탓에 약간 긴장하며 택시를 탔다. 사실 기사 아저씨랑 대화를 하다 '태국이 처음인데 혼자 치앙마이에 온 거야?'라는 물음에 짧게 '네'라고 대답하면서 혹시 이게 내 마지막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으니, 약간 긴장한 정도가 아니었다. - 의심 많은 타입 - 하지만 아저씨는 친절하게 날 호텔로 데려다줬고, 숙소 직원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친절하게 체크인을 도와줬다.


다음 날, 조식을 먹으러 방을 나왔다가 처음으로 치앙마이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불안해서가 아니라 설레서. 낮은 지붕들 사이로 높은 사리탑이 보이는 이 이국적인 도시에서 보낼 시간이 너무 기대됐다.

태국은 국민의 90%가 불교를 믿는 독실한 불교 국가다. 그리고 과거 란나 왕국의 수도였던 치앙마이에는 사원이 즐비하다. 태국어로 '왓'은 사원을 뜻하는데, 치앙마이 지도에는 이 '왓'이 계속 등장한다. 왓 체디 루앙, 왓 프라싱, 왓 록 몰리, 왓 우몽. '왓'이 붙지 않은 그냥 가정집이나 식당의 한켠에도 불상이 있다. 어느 사원이고 진지하게 기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 초반에는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풍경이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내가 치앙마이에서 마이 붓다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치앙마이 올드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왓 프라탓 도이수텝은 306개의 계단을 오르면 등장하는 화려한 금빛 사리탑이 인상적인 곳이다. 저녁 시간대에 방문하면 노을에 물든 사리탑과 조명이 켜진 사리탑 그리고 반짝이는 치앙마이의 전경까지 볼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야경 투어로 이곳을 찾는다. 나 역시 치앙마이까지 왔으니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건 압도적인 황금색 사리탑이었지만, 곧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와불상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기원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왜 와불상일까 궁금해졌다. 나의 짧은 영어는 가이드에게 '저 부처님은 왜 누워있어요?'로 전달됐다.

'사람마다 자신의 부처가 있기 때문이에요'. 가이드는 태어난 요일에 따라 내가 모셔야 하는 불상이 있다고 알려줬다. 솔직히 MBTI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난 요일에 따른 마이 붓다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이드는 친절하게 내 생년월일을 검색해 내가 무슨 요일에 태어났는지 확인하고는 '월요일 부처'를 소개해 주었다. 와, 회사가 지긋지긋해서 치앙마이에 왔는데 월요일 부처를 만나다니 나도 참 나다. 


월요일 부처는 싸움을 말리고 용서와 화합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부처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이름을 지었다. 부모님에 이어 부처까지 온화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이 우주의 흐름을 내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어요. 그렇게 월요일의 부처를 마이 붓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치앙마이에서 확실히 난 너그러워졌다. 월요일 부처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느긋하게 일어나 출퇴근 시간에 한두 장씩 읽던 책을 찬찬히 읽으며 조식을 먹고,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지치면 타이 밀크티를 마시는 삶을 살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고, 계속 잔잔하게 나를 괴롭히던 불안도 사라졌다.


성을 제외한 나의 이름 두 글자는 모두 너그럽고 온화하라는 뜻이다. 난 부모님이 고심해서 지어준 내 이름을 좋아하지만, 때때로 이름이 내게 그런 삶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부담도 들었다. 나는 너그럽지도 않고, 관대하지도 않고, 온화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때때로는 내가 왜 너그럽고 온화해야 해?라는 반항심이 들기도 했다. 싫어. 난 쌈닭이 될 테다.


불상이 가득한 도시를 다니다 보니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남에게 너그럽고 온화하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 되길 바랐던 거였구나. 네, 내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만큼 나를 너무 미워했던 게 아닐까. 나를 몰아세우는 걸 그만하고 나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된다면, 계속 심박수를 올리는 부정맥 같은 이 불안도 사라지지 않을까. 돌아오는 날, 선데이 마켓에서 월요일 부처를 샀다. 사실 안 사려고 했는데 이모가 돌아서려는 날 붙잡고 자꾸 값을 내리길래 그냥 샀다. 내가 다시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게, 나 자신과 싸우는 걸 말리는 부처가 돼주길 바라면서.


월요일에 태어난 사람은 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다. - 진짜 MBTI보다 솔깃한 마이 붓다 시스템 -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병에 걸렸던 나는 숨 좀 쉬려고 간 치앙마이에서 부처를 만났다. 그리고 나와 화해했다. 무언가가 인도한 듯한 이 여행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만족스럽고 소중한 시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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