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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Aug 04. 2021

다시 시작..

#8. 누구도 원치 않았던 불안이 다시 스미기 시작했다.

엄마가 세손녀딸들의 양육에 사표를 던지고 본가로 돌아가신지 1년이 훌쩍 지났다.

"막내 1학년갈때까지 있어볼께" 라고 하셨던 말씀이 거짓말 처럼 현실로 다가왔다. 공황장애로 힘들어하시던 엄마에게 이제 우리 걱정은 말고 편하게 집에가셔서 혼자 쉬셔도 된다고 말씀드릴때마다 "아프니 이제 가라한다"며 나의 의도와 달리 전달되는 메세지에 갈등도 적잖았었는데 코로나로 아이들이 학교에 안가니 마침맞는 결정의 시기였을까.. 하루종일 아이들과 전쟁통인 집에서 엄마가 자발적적으로 사표를 내고 가시길 벌써 1년 하고도 수개월이 지닜다. 꽃이피고,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가을 단풍이 지고, 눈이 녹고, 다시 새싹들이 봄을 알리더니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엄마가 가신후 막내 아이는 급변하는 확진세에 온라인 수업으로 전향될때마다 외가에 내려와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서서히 떨어져있기 연습을 했다. 

엄마도 전쟁통이긴 했어도 막상 혼자 집에 계시니 적적함에 아이들이 보고 싶은지 하루종일 뉴스만 보다 온라인 수업이라는 발표만 나면 빨리 오라고 아우성이셨다. 


조금은 더딘듯 했지만 우리는 서로가 홀로서기를 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다시 저마다의 삶 속에 스미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통으로 눈뿌리가 빠져 나갈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 하시던 엄마가 일어나다 쓰러지기를 몇번.. 얄궂게도 늘 엄마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때만 기막히게 찾아오는 이석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엄마의 두통을 슈퍼클라스로 만들어주었다.

두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MRI와 갖가지 검사가 시작되었다. 다행이도 뇌병명이란 시련은 엄마를 피해갔다. 후각을 잃을만큼 오래전부터 의심해왔던 심각한 부비동염의 통증이라 판단한 의사가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술을 권유했고, 예민함과 걱정, 불안으로 그 어떤 검사도 순탄지 않은 엄마에게 수술은 그 크기와 중대함을 떠나 '수술'이라는 두 글자로 중압감과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눈뿌리가 빠질듯한 고통보다야 더 두렵겠냐며 엄마가 자신안의 모든 용기와 오기를 발휘해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3일간 코를 막고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는 회복과정까지 너무나도 감사히 잘 버텨준 엄마에게 더 이상 두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리고 나는 꿈에 젖었다. 엄마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하며 멋지게 여름휴가를 보낼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이 큰 착각이었음을 아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의 마음에 하나둘 쌓였던 불안들이 점점 본색을 드러내며 엄마 마음을 장악하고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을.. 


마치 눈뿌리가 빠지는 고통만큼은 내가 양보하겠노라며 큰 선심이라도 쓴 듯, 엄마의 회복기간을 기다려 주기라도 한 듯, 엄마는 돌을 씹는 것 같다며 모든 식욕을 잃었고, 사람이 없으면 불안하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전화를 하셨다. 호흡이 힘들다고.. 혈압이 180, 190까지 올라간다고.. 너무 힘들어 죽는게 낫겠다며..




엄마가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지난 2년간 한번도 가지 않았던, 그토록 엄마가 경계하며 철저하게 차단해 왔던 그곳을.. 엄마는 처절하게 자신을 살려달라 애원하며 다시 붙잡고 말았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일지, 엄마를 살리는 황금 동아줄일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확신했다. 그것은 결코 엄마를 돕는 황금 동아줄이 아님을.. 다시 엄마를, 우리 가족을 흙탕물로 밀어넣는 썩은 동아줄임을.

(분명 환자에게 적절한 약물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약물 치료가 다시 엄마를 얼마나 갸날픈 존재로, 힘없는 한 인간의 탈을 쓴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지를 먼저 떠올린 나였기에 긍정적 치료효과를 들여다볼 여유 따윈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더 정확히는, 두려웠다.

엄마가 다시 응급실을 가기 시작한날..

불안하다 말하며 다시 치솟는 혈압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목을 만지며 내 몸의 변화에 집중하던 엄마를 보는 순간..

기력없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전화를 받던 그 순간..

오빠가 병원에 왔다며 내게 전화를 하고 메세지를 보내오던 그 순간..

그 모든 순간 내 머릿속은 지난 엄마의 공황장애 투병기가 빠르게 필름처럼 스치고 있었다.

그 어떤 장면 하나도 생생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어떤 내 마음의 감정 하나 잊혀진 것이 없다.


갑자기 불안해하며 자가 호흡이 어려워 119를 부르고,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가고, 피검사에서도 이상소견이 없어 의사들에게 마치 양치기소년처럼 처음에는 환자로서의 대우를 받겠지만 점점 등한시 될 엄마의 존재감, 환영받지 못할 모습에 또 다시 자괴감을 느끼며 외로워 할 엄마..

 

역시나 엄마가 두세번 동네 종합병원의 응급실을 찾았을 때 어느 젋은 의사가 다시는 119를 타고 오지 말라며 엄마를 훈계했단다. 이에 질세라 엄마는 "이럴때 마다 이렇게 혈압이 올라가는데 내가 혈압 올라가 쓰러져 죽으면 책임질거냐"고 응수를 했고, 이에 의사는 "오실 때마다 해드리 수 있는게 신경안정제 밖에 없는데 더이상 약물 투여는 어렵다"고 약물 중독성을 우려하며 단호하게 엄마를 거절했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이 엄마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거절한 의사의 대응이 예전처럼 썩 불쾌하거나 하지 않았던건 어쩌면엄마의 응급실행을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한방이라는 생각에 엄마 스스로 이겨 싸워야 하는 마음의병임을 다시한번 대변해준 것에 대한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불안과 다시시작될 공황장애가 결코 다시 시작이라는 말로 우리가족을 애워싸지 않기를 그렇게 나는 철저히 모든 상황을 차단하고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탈출할 수 없는 암흑의 그림자가 점점 나를 애워싸고 있었다.

따뜻한 공감과 위로보다 충격요법이랍시고 엄마에게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채 강력한 한방을 날리면서 엄마를 코너로 몰아부쳤다. 

엄마의 상황이 어떤지, 엄마가 무엇으로부터 외로움을 느끼는지, 왜 불안한지.. 내게는 그저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수년간 곁에서 보아온 엄마의 공황장애가 다시 엄마에게 오는것을 나는 온몸으로 맞서 반대하고 있었다.

이미 엄마는 자신을 애워싼 그것과 격렬히 사투를 벌이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줄도 모르고 오지마라 오지마라 이번만큼은 안된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올 수 없다며 그렇게 내 삶의 퍼즐이 흐트러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그 잘 짜여진 그 퍼즐판에 엄마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편하게 걸어들어와 함께 이 행복의 퍼즐을 완성시키면 되는데 무엇이 그리 불안하냐며 엄마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엄마는 왜, 어떤 이유로 당신이 내가 만든 판에 들어와야 하는지도 모른채 자신의 아픔을 공감하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과 화로 그렇게 외로이 자신만의 비상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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