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살이 지나면서 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모든 일을 '관성'에 맡기고 있었다. 일도, 취미도, 타인과의 관계도, 심지어 자기계발까지도. 이걸 왜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저 늘 해왔던 걸 남들이 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 습관처럼. 핸드폰 화면에 온 정신을 처박고도 집은 잘 찾아가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서늘함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새로운 걸 시도해봐도 그때뿐. 자기 전, 설렁설렁 양치를 하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 머리로만 굴려보는데 우연히 한 예능 프로를 보게 됐다. 프로그램은 <슈퍼맨이 돌아왔다>. 어느새 열 살 초등학생으로 훌쩍 큰 나은이가 등장했다.
어머 나은이가 벌써 저렇게 컸네. 마치 김연아 선수를 연상케 하는 열정으로 나은이는 새벽부터 아이스링크장에서 피겨 연습을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연습하는 모습. 나이가 어린데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아우라가 느껴져 신기했다.
하지만 뛰어난 피겨 실력을 뽐내던 나은이는 곧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 시작했다. 엑셀 점프가 문제였는데, 옆에 다른 친구는 같은 점프를 보란듯이 성공해 승부욕이 불타는데도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나은이는 꿋꿋했다. 계속 일어나서 도전하고 넘어지고, 또 도전하고 넘어지고. 삼십 분이 넘도록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좌절했다. 어느새 나도 응원하는 마음이 되어 '괜찮아 나은아, 지금 많이 넘어져야 해. 그래야 더 잘 할 수 있어!'라며 마음을 종종 거리고 있는데,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또 같은 점프를 하다 넘어진 나은이가 링크장 바닥에 턱을 살짝 찧은 것이다. 그러고도 울지 않던 나은이였는데, 걱정이 되었던 선생님이 나은이를 아빠 곁에 데려다주자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걸 보는 나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처음엔 '어, 나 왜 울지?' 당황스러웠는데 곧 깨달았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어서. 나은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른이 되어도 서른이 넘어도 여전한 감정이라 눈물이 났다. 잘 하고 싶고 잘 할 자신도 있는데 자꾸만 결과가 안 좋아 속상한 마음. 좋아하는 일인만큼 승부욕은 강해지고, 자존심이 세진 만큼 아픈 티도 내기 싫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데도, 모든 게 내 맘처럼 안 돼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때. 이거보다 더 큰 아픔도 무덤덤하게 버텼으면서, 작은 생채기 하나에 틀어막아둔 감정의 둑이 터져나가는 순간.
라커룸으로 돌아와 축 처져 있는 나은이를 보며 아빠는 말했다.
쉬어 쉬어. 오늘은 훈련하지 말자.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은이는 괜찮아, 라고 하며 이어지는 인터뷰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고인 박웅현은 한 인터뷰에서 '나의 약점과 단점을 껴안으면서까지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울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럴 땐 매직 워드(Magic Words)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내 안에 힘이 있을 것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약하다는 거죠. 남들은 강해 보여요. 특히 나보다 성공한 사람들, 각광받는 사람은 늘 강해 보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도 약해요. 그걸 아는 게 되게 중요해요. 그리고 내가 못난 것만도 아니에요. 잘난 구석도 있어요. 이런 걸 찾아내고 발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자기 삶을 걸어 나가는 거겠죠. 부러워만 하다 보면, 자기 것도 놓쳐요."
어른도 버티기 힘든 마음 앞에서 열 살의 꼬마 아가씨는 한 번 더 일어서는 걸 택했다. 서른 살 어른인 내가 관성이라는 멋없는 답을 찾아 회피했을 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답을 찾은 것이다. 계속 넘어지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이스링크장으로 향하는 나은이의 뒷모습을 보며 박웅현 작가의 그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모든 성장을, 모든 가능성을 한 단어로 요약한 마법의 말이.
그리고 내겐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내가 알람 없이도 새벽같이 일어나 뛰어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은이에게 피겨처럼, 어렸을 때의 나처럼, 시간과 열정을 계산 없이 태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꼭 이 답을 찾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커지는 만큼 피곤과도 싸워야 하지만, 피곤하기 싫은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니까. 아무 흔적 없이 매끈한 살보다 존재감 넘치는 굳은 살이 좋고, 쉽게 아물지 않아도 자부심이 되는 영광의 상처가 더 멋지다고 나는 믿고 싶다.
오늘의 질문.
Q.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