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유럽여행 동반자로 만난 한 살 많은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나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었고, 그러면서 조금씩 불편해졌다. 그래도 나머지 일행 두 명이 더 있었기 때문에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여행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 오빠와 남동생 한 명과는 여행 중간에 헤어지게 되었다. 둘은 한국에서 함께 일정을 짤 때부터 체코 프라하 대신 다른 나라를 가겠다고 말했던 터라 여행 도중에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갑내기 여자친구 한 명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체코를 여행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유럽 여행 일정에서 가장 기대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엄청 기대하며 기찻길에 올랐는데, 그만 도중에 큰 사고 아닌 사고를 겪고 말았다. 기차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체코 프라하가 아닌 독일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이였던 것이다. 표를 살 때 직원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순진했던 우리는 기차역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기차가 와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 8시가 넘도록 다른 기차는 오지 않았다. 승무원도 모두 퇴근한 뒤라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우리는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밤 10시를 넘겼고, 그곳에서 침낭을 펴고 하룻밤을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역이 너무 개방되어 있는 곳이어서 조금 무서웠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국경 마을에 내려가보기로 했다. 워낙 외진 마을이어서 그런지 길을 걷는 내내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20키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걸으면서 어깨가 뻐근해질 때쯤 다행히 한 독일인 가족을 만났다. 그 어둡고 늦은 밤에 두 명의 동양인 여자 아이들을 만난 것을 그들도 당황해했다.
그들은 우리의 은인이었다. 친절하게 우리를 마을 중심지까지 안내했고 숙소까지 잡아줬으며 먹을 것까지 챙겨줬다. 그 늦은 시각에 그 가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우리에게 생겼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은 하늘에 계신 분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프라하에 입성했다.
프라하... 도시 이름도 어쩜 이렇게 낭만적인지.
프라하의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바로 달려나갔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내게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프라하가 단연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낮에도 예뻤지만, 특히 밤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서 온종일 걸어서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카를교 주변을 한참 걷다가 오르막길 즈음에 있는 상점에서 기념품을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친구와 나는 살짝 다툰 뒤였던 것 같다.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혼자 여행하고 있는 동양인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중국인처럼 보였다.
짧게 자른 스포츠 머리, 꼭 무술을 배운 것 같이 잔근육이 조금씩 보이는 다부진 몸, 귀여운 얼굴을 가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중국 배우 이연걸을 떠올리게하는 외모였다. 그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Are you Korean?" "Yes, we are."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혼자서 유럽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다음 학기에 복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오래간만에 한국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현재 유럽을 여행하고 있고, 프라하에는 내일 오전까지 머물 예정이라고 말하고는 헤어졌다.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나는 뭔가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어떤 감정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 본 남자에게 무턱대고 다가가서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만 두었다. 그렇게 아쉬워하며 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우리를 다시 부르며 뛰어내려왔다.
"괜찮으면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요? 하도 혼자서 밥을 먹었더니 외로워서요!"
나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멋쩍어했다. 길을 내려오면서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서로에 관한 간단한 신상정보와 여행의 목적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친구와 다툰 것도 잊고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다는 그는 말투나 몸짓 하나 하나가 굉장히 섬세했다. 못지 않게 섬세한 감각을 가진 나는 대번에 그가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