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하루를 시작하며, 2014>
필자가 사는 곳은 제주시 동북부 지역에 자리한 작은 시골 마을 평대리이다. 마을 산간 쪽에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비자림이 있다. 수령 500~600년 된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숲을 이룬 이곳은 1993년 부터 천연기념물 37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숲 한 바퀴를 도는 데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 1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안과 삶의 여유를 얻어 간다.
비자림에 들어서면 자박자박 밟히는 화산송이와 가까이서 울어대는 새 소리,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람 소리가 온전히 자연 속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연 스스로 만들고 가꾸어 온 숲. 비자림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취하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비자림을 찾고 있다.
작년 말쯤, 오랜만에 비자림을 들렀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올드 팝송이었다. 처음엔 옆 관광지에서 넘어오는 소리인가 싶었다. 혹은 관광객이 휴대폰을 크게 틀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리의 근원을 찾다 보니 숲 속에 작은 바위로 위장한 스피커가 있었다. 바로 그 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노래 선곡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음악에 숲의 소리가 묻히고 있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돌멩이길(오솔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필자가 그네 나무라 부르는 우람한 나무 옆길을 없애고 우회로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다 보니 나무를 보호하고자 만든 조치이지 싶었다. 그렇다 해도 원래 울퉁불퉁하던 돌멩이길에 잡석 같은 자갈을 깔아놓은 것은 무엇일까. 예전보다 걷기가 편해지기는 했지만 발걸음마다 달그락달그락 돌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그 탓에 새 소리도, 바람 소리도 모두 묻혀버려 호젓하게 즐기던 귀의 호강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콘크리트를 연상시키는 회갈색 자갈은 이질적이었다. 결국 걷는 둥 마는 둥 어영부영 산책을 마쳤다. 여유와 평안, 안정을 얻으러 갔다가 마음만 잔뜩 찌푸린 채 돌아온 셈이다. 왜 굳이 길을 그렇게 고쳐(?)놔야 했을까. 예전 돌멩이길은 다소 거칠고 걷기 불편한 점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자연미가 매력이었는데 말이다.
비자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편의를 위한 시설물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자연은 사람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파괴되고, 강인한 생명력도 잃어간다는 진리를 다시 꺼내보게 된다. 진정한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불편함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의 눈과 발이 편하고 좋아질수록 자연은 속으로 곯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비자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환경 정비다 뭐다 해서 인적 드문 숲이나 오름, 해안길에 인위적인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다. 필요에 의한 것들도 있겠지만 어떤 것은 불필요하거나 군더더기처럼 여겨진다. 과유불급. 너무 과하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자연이 그렇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고 이로써 삶의 위안과 평안을 선사한다. 무언가를 자꾸만 더할수록 자연은 빛을 잃고 무너져버린다. 그 후에, 우리들은 어디에서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찾을 것인가.
2014년 한라일보 <하루를 시작하며> 코너에 실렸던 칼럼을 다시 읽으며 2023년의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예전에 썼던 칼럼이지만 다시 읽어 봐도 그 때나 지금이나 자연에 대한 철학이나 정책들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당시 숲 속 스피커는 저만 떠든 것이 아니었던지 다행히 며칠 안 돼서 바로 철거되었습니다. 숲에선 숲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개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숲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면 이어폰을 끼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스피커는 사라졌지만, 그 후 비자나무숲엔 더 많은 시설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물론 안전이 중요하지만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관리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숲 안에 CCTV와 비상벨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등산로에나 있을 법한 에어건과 편편한 길에 야자매트를 설치한 건 너무 과한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엔 자연 그대로의 '숲'이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했지만, 지금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잘 관리되어 있는 숲을 즐기는 '관광지'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