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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8. 2023

당근 새싹들, 안녕?

제주 밤산책 일기 827

밤 8시.

시계를 흘긋 쳐다 보니 시간이 벌써 저리 되었더군요.

침대에 늘어져 있던 몸을 간신히 일으켜 한 발씩 신발을 신깁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기까지 꽤 힘들었어요. 어젯밤 치팅 데이였거든요. 

밤 늦게까지 영화와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온종일 몸이 찌뿌둥해 하루 건너 뛸까 생각도 했지만 한 번이 두 번, 세 번 될 것이 뻔하기에 문을 확 제껴 열었어요. 뭐든지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일단 발을 디디면 어떻게든 해나가게 마련이잖아요.  


왠지 오늘은 다른 느낌을 갖고 싶어 늘 가던 길을 거꾸로 걸어봤습니다. 

'풀쩍.' 길 한 가운데 있던 개구리 한 마리가 위협을 느꼈는지 길섶으로 급히 몸을 던졌어요. 손가락 만한 작은 생물체에 오히려 놀란 건 나인데. 서로가 서로를 모르니 두렵고 경계해야 할 수 밖에요. 심지어 같은 종인 인간 사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왕왕 벌어지잖아요. SNS 뒤로 자신을 감추기 바쁜 익명 사회에선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으니 서로가 친구인 동시에 적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웃픈 현실인 것 같아요. 


늘 걷는 길인데 방향을 바꿔 보았더니 다른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시선도 달라지다 보니 전엔 못 보던 것들이 보였어요. 가로등이 저렇게 빛났었나 싶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다니던 동안 무더위를 뚫고 당근 새싹이 많이 올라와 있었어요. 푸릇하게 솟아난 새싹들을 보니 거꾸로 걸어 보기를 잘했다 싶었어요. 늘 같은 시선으로만 봤으면 이렇게 어여쁜 새싹들의 시기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을 테니까요.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평범한 시골 길도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데 삶의 문제에 대해선 왜 늘 똑같은 방식으로만 풀려고 하는지, 뭔가 머릿속에 딩동! 하고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요즘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하나 갖고 있거든요. 계속 같은 방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으니 도돌이표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건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내일부턴 문제를 뒤집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숙제가 술술 풀릴 수 있기를! 



사실 오늘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바다'였습니다. 

한동안 너무 습해서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안했는데 오늘은 바람이 뽀송뽀송한 데다 골목 사이로 보이는 어선들의 불빛에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해안도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더니 파도가 부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왜 이제 온거야, 내내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들. 무언가에 홀린 듯 밤바다를 한참 쳐다 봤습니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햇살에 반짝이는 것 마냥 저 멀리 수평선에 걸쳐 있는 불빛을 타고 검은 윤슬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밤바다는 두렵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멀리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럴 수록 더 가까워지고 싶은. 


언젠가 동네를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이토록 아름다운 밤들이 너무나 그리워 질 것 같아요. 

조금 덜 아쉬울 수 있도록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다니고 기록해 두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여쁠 제주의 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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