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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Dec 02. 2023

다시 찾아온 ‘삽시간의 황홀’

오름이 있는 제주 여행 | 용눈이오름

물결치듯 부드럽게 흘러내린 능선 위로 한 발씩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어릴 적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처럼 안온하고 따스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2년 반 만에 찾은 용눈이오름은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누구든 넉넉히 품어 주는 기운은 변함이 없다.  

제주 올레길로 인해 걷기 열풍이 시작됐다면 오름 여행은 용눈이오름이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이은 영화, 드라마 촬영과 때마침 불어온 SNS 붐을 타고 여행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용눈이오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탐방로와 주변 환경이 훼손되는 상처를 입었다. 2021년 자연휴식년제로 문을 굳게 걸어 닫은 지 2년 5개월. 탐방길이 다시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오래도록 보려면 자연도 쉬어 가야 

용눈이오름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던 것인지 재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름을 찾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을 걸어 닫기 전에도 언제나 주차장이 꽉 찼을 만큼 유명세를 치르던 곳이었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일 년 내내, 그것도 하루 온종일 온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맞아야 했으니 오름이 탈이 날 만도 했다. 

지그재그로 엮인 입구를 지나며 문득 문을 걸어 닫기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탐방로에 깔린 야자매트가 해지고 찢긴 것은 물론이고 폭탄 파편이 떨어진 것처럼 부근의 지면이 심하게 파이고 깎여 있었다. 땅 속 붉은 흙이 밖으로 드러난 곳에는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아 마치 헐벗은 산처럼 보였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건 아니지만 답압이 누적되면서 자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결과였다. 자연도 쉬어 가야 오래도록 볼 수 있다는 걸 뒤늦게라도 깨달아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자연휴식년제’라는 긴급 처방이 효과가 있었던지 속살이 드러난 곳에는 풀이 자라고 파이고 깎였던 지면도 많이 복구되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시간이 효과적인 회복약이 된 듯했다. 용눈이오름이 예전 모습대로 돌아온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흘러나왔다. 그 사이 주변을 재정비해 마치 새 옷을 입혀 놓은 듯 말끔해 보였다. 

몇몇 달라진 모습도 눈에 띄었는데 탐방로 이외에 구역은 함부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휀스를 둘러쳤으며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던 정상부는 작은 숲을 이룰 정도로 번성해 있었다. 무엇보다 분화구 한쪽 면을 오가지 못하도록 출입을 통제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이제껏 자유롭게 오르락내리락했던 곳이 개인 사유지였다니, 그 또한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라 하겠다.    

  

분화구 일부는 사유지로 출입통제 

방목해 키우던 마소들도 그동안 발길이 뜸했던지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자연휴식년제 이전에는 따라비오름, 아끈다랑쉬오름과 함께 동부 지역의 억새 명소로 이름을 올리곤 했던 터라 이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석양빛에 물든 용눈이오름과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억새 군락의 조합은 환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풍경을 다시 보게 되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탐방길을 따라 정상부에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길은 노약자나 어린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을 만큼 평탄하다. 용눈이오름은 높이가 88m 밖에 안 되지만 산간 지대에 자리해 해발고도가 무려 247m에 달한다. 그런 덕분에 자신보다 더 높은 오름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매혹적인 풍경을 펼쳐낸다.

 

마지막 걸음을 옮기자마자 세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한바탕 헝클어 놓고 달아나버렸다. 자신 안에 품은 보석을 쉽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심산인 걸까. 눈을 가린 머리카락들을 떼어 내자 멀리 한라산이 품에 안기고 위풍당당하게 선 다랑쉬오름이 마주 보였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벅차오르는 감동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분화구의 반대편은 가볼 수 없다는 것. 금지 구역이 된 갈림길 길목에서 거대한 바람개비가 꽂혀 있는 풍력발전단지만 눈에 담고 내려왔다.      


김영갑 작가가 가장 사랑한 오름

용눈이오름의 매력은 사실 오름 그 자체에 있다. 제주의 오름들 중 거의 유일하게 분화구를 3개나 가지고 있는 희소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능선들이 겹쳐 나타나는 모습이 예술이다. 먼 옛적 분화구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빚어낸 유려한 곡선을 바라볼 때마다 감탄이 터져 나온다. 제주 섬이 빚어낸 명작 중의 명작이다.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용눈이오름에 머물렀던 이유도 이 부드러운 능선에 있다.  

용눈이오름을 이야기할 땐 고(故) 김영갑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오름’이란 단어조차 낯설기만 한 시절, 이들을 세상에 알린 것이 바로 김영갑 작가이다. 외부와 거의 단절되어 뭍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머나먼 섬으로만 여겨지던 때였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도를 접한 그는 거칠고 순수한 자연에 매료되어 1985년에 아무 연고도 없고 낯설기만 한 섬마을로 혈혈단신 건너왔다. 오로지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남기고 싶다는 마음과 끊임없이 타오르는 열정만 갖고 홀로 섬에 정착한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용눈이오름에 홀려 새벽부터 밤까지 오름 사이를 누비며 황홀한 찰나의 순간을 기록해 온 그는 갑작스럽게 루게릭병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2005년에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보다 더 이곳을 사랑했던 김영갑 작가. 유작으로 남은 수 만장의 필름들이 그의 외사랑을 말없이 보여준다. 차로 약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은 생전에 그가 폐교에 꾸민 작업실이자 전시 공간이다. 용눈이오름은 물론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그가 만났던 때 묻지 않은 신비로운 제주가 그곳에 있다.     

 

레일바이크 타고 구좌읍 한 바퀴 

조금 아쉽다면 용눈이오름과 이어진 너른 들녘을 레일바이크를 타고 달려보자. 푸른 초지대인 이곳은 원래 소들을 풀어놓고 키우는 상도리 마을의 공동목장이다. 주변 오름과 시원하게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을 두루 감상하는 이색 체험인 제주 레일바이크를 마을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레일바이크는 자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페달을 힘들게 밟아야 하는 수고로움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스쳐가는 풍경을 눈에 담기에 적당한 속도로 달리지만 굴곡진 구간에서는 빨라지기도 해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스테이션을 출발해 초지를 누비는 동안 상도리를 비롯해 구좌읍의 마을 이름이 적힌 푯말들을 하나씩 지나게 된다. 운이 좋으면 들녘 가운데서 낮잠을 자거나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도 만날 수 있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3년 11월 호에 게재된 기사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모든 글과 사진은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으며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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