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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Aug 25. 2022

'실수'해도 괜찮은, 세상

어제 설거지를 하면서 프랑스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일부러 시간 내서 들을 수는 없지만 되도록이면 집안일을 할 때는 프랑스어 라디오를 틀어 놓으려고 한다. 그것도 늘 뉴스 위주로 방송하는 채널을 틀어 놓곤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든 귀를 열어 보겠노라는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뉴스를 듣는 것은 사실상 듣는 정보보다 흘려보내는 정보가 훨씬 많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도 큰 줄거리라도 이해하면, 간혹 들리는 문장들이 있으면 그것이 어찌나 기쁨이 되는지.


어제도 그렇게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는데,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앵커가 전화 연결한 기자가 전화로 사건을 소개하다가 아주 크게 재채기를 한 것이다. 모든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 청취자인 내 귀에도 그것은 너무나 선명하고 크게 들렸다.


순간, 나는 '아이코, 어쩌나, 생방송에서 큰 방송사고네...'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라디오를 주시했다.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앵커는 '허허' 웃었고, 기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내용을 소개함으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했다. 누구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미안해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 분위기는 나에게 참으로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듯 손놀림이 서툰 직원 앞에서 남편과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받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받아 든 아들이 먹기 시작하고, 이제 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여전히 느린 손놀림으로 묵묵히 콘을 위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있었고 겨우 다 담겼을 무렵, 아이스크림 콘의 한쪽 귀퉁이가 톡 하고 부러졌다.


직원은 남편을 쳐다보았고, 남편도 직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직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Tant pis (어쩔 수 없지)´하고 말했다고 했다. 남편 앞에 미안해하거나 주눅 드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콘을 가져다가 천천히 자신의 속도대로 아이스크림을 떠 넣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제 뉴스를 듣다 유독 실수에 태연한 사람들의 반응이 오래 마음에 남은 까닭은, 직접 보지도 않은 아이스크림 직원의 모습까지 떠올린 까닭은 사실은 다른 데 있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한국 도서관 나들이를 갔다가 마주한 한 장면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보고 싶었던 책을 고르고 난 뒤 대출하려고 갔을 때 직원은 몹시 분주해 보였다. 방학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 사람이 많았고,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키던 분이 아닌 걸로 유추해 볼 때 새로 일을 시작한 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대출을 할 때 갑자기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 한 권의 책이 읽히지 않고 있었다. 바코드를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컴퓨터도 여러 차례 조작하는 그의 손길에서 점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뒤에 서 있는 내게 먼저 대출을 해 주겠노라 했다. 그런데 이젠 아예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직원은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너무나 당황해하고 난처해하며, 기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다시 켰다 꺼야 할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직원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 깊은 곳까지 안쓰러웠다.  


괜찮다고 편하게 하시라고 하고는 아이들에게 가서 편하게 책을 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도 서가 쪽으로 돌아서서 책을 훑어보는 척을 하고 서 있었다. 그게 직원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안을 더해주길 바라면서.



그랬다. 사실은 그 모습은 내 모습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깜짝 놀라고 당황해하고 미안해하는 모습, 그 낯익은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었다. 아니 나뿐 아니라 나와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엄마의 모습, 할머니의 모습,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실수 앞에 허허 웃고 넘어가지 못하고 주눅부터 드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실수가 미안하고 부끄럽고 힘든 일이라 여기며 자랐고, 작은 실수 앞에서도 자책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이것은 타고난 내 성격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자라고 내가 속했던 문화로부터 학습된 태도이기도 한 셈이었다.


실수가 용납되지 못하고, 실수하면 미안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나는 그렇게 실수할까 봐 긴장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에 주저하고, 혹여라도 실수를 하면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르고 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살아있는 존재에게 실수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게 무엇이든 새로운 걸 시도하고 그것을 잘하기까지 '실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게 입력된 로봇처럼 모든 것에서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실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바람이었고, 그 무거운 부담을 졌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싶다.



생방송에 재채기가 나와도 허허 웃고 넘길 수 있다면, 그런 실수가 그 사람을 향한 어떠한 비난의 근거도 될 수 없다면.


서툴러서 벌어진 실수 앞에서 스스로 '할 수 없지 않냐'라고 웃으며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다시 차근차근해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그들의 실수를 향해 누구도 질책하거나 채근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회를 꿈꾸지만,

먼저 나부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서툰 프랑스어로 낯선 이방 나라에서 살아가는 실수투성이 하루하루를 조금은 더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내가 그러하듯

오늘도 서툰 실수들 앞에 마음이 움츠러들었을

누군가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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