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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Jun 04. 2022

노란 공책 한 권이면 충분해요

프랑스 학교의 느슨한 소통 방식

한국에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동안, 아이들집에 돌아오자마자 확인하는 하루 일과 수첩 앞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다섯 ,  살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여력이 없어 어린이집에 맡겼지만, 막상 어린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겨 기른다는  불안하기도 했기에 하원 후에 선생님이 정성스레 써준 노트를 보며 비로소 안심을 하곤 했다.


오늘은 어떻게 놀았는지, 밥은  먹었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작지 않은 노트  페이지 혹은  페이지를 사진과 함께 빼곡하게 적어놓은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정성이 마치 우리 아이를 향한 정성 같이 느껴져 안심이 되곤 했다. 그러나  노트를 덮으면서 마음 한편에 드는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들 반에는 학생 수가 적어도  명이 넘었다.  어린  반은  명이   되었지만, 손은 훨씬  많이 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토록이나 정성스러운 노트를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작성한다는 말일까?


 아이를 기르는 동안  좋아하는 글을 쓰는 일도,  읽는 일도 짬을 내기 힘들어 포기하다시피 살아왔던 날들을 돌아보면, 선생님의 형편이 절로 헤아려졌다.   내외의 아이들의 수첩에 정성을 들여 빼곡히  아이들의 일상에 대해 적고 있을 선생님, 아이들의 낮잠 시간 동안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자신의 교사로서 완전했던 하루를 입증해야만 하는 선생님의  수고와  남몰래 쌓여가고 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찜찜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와 그런 압박이 어쩌면 흔히 뉴스에서 보는 그런 가슴 아픈 사건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올라오곤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래서 아쉽게도 한국의 초등학교를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 '학교'라고 하면   년도  전에 내가 다녔던 학교의 풍경이 떠오르고,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풍경은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교사 경력, 그마저도   전에 경험했던 학교 풍경이었다.


스마트폰의 시작과, 이제  카카오톡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학부모님들에게 교사의 전화번호는 너무나 당연하게 공개되었고, 번호만으로도 카카오톡은 자연스레 연결되곤 했다.


학부모님들은 정말 편안하게 교사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하거나, 카톡을 보내곤 했다. 학교 교무실 번호도 아닌 개인의 번호가, 학교에 근무하는 시간도 아닌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도 열려 있었던 것이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때로 주말이나 저녁 늦게 학부모로부터 그런 연락을 받을 때면, 나는 번뇌했다.


즉각적으로  반응을  줘야 하는 것인가, 거기까지가 의무인 건가 아니면 내가 먼저 나의 선을 확실하게 그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학부모 편에서 보면 헤아려지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주말에 연락을 해야  만큼의 위중한 문제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 애매모호함이 사실은  어렵고 힘들게 만들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으로의 삶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 조금씩 쌓여 은근한 스트레스로 자리 잡아갔다. 업무와는 크게 상관없는, 그러나 꽤나 무거운 짐이었다.

  


지금 한국의 학교가 어떤지 사실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 서울시 교육청이 담임교사들에게 업무용 핸드폰을 따로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혀서 논란이 되었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된 뒤로는 더욱 교사가 학부모들과 개인적인 연락을 직접적으로 수시로 주고받게 됨으로써 어려움을 겪었다는 내용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아들이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번도 교장부터 담임교사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랬다. 번호를 주는 쪽은 나였고, 그것도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예를 들어 갑자기 아이가 아프다거나, 다쳤다거나 하는 경우에만 전화를 받았다.  외에 행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대개 메일로 주고받았다. 아이가 결석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나는 메일로 고지했고, 상대도 메일로 답을 했다.



그런가 하면 담임과 학부모를 이어주는 것은 고작 작은 노란 공책 한 권이었다.


거기에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공지나, 혹은 메시지가 적혀서 오곤 했다. 그럼 우리는 읽고 동의한다는 짧은 답을 써 보내거나 서명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을  '미리' 우리는 노란 공책에 적어야 했다. '미리' 요청할  있다면 노트로 묻는 것은 우리에게 하등 불편함이 되지 않았다. 노트를 가지고 가면 교사는 그날 읽고 바로 답을 주곤 했으니까.


그러나 '미리' 그것은 요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부모 편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교사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학부모는 그만큼의 성실함과 세밀함을 안고 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큰 어려움이 되지는 않았다. 교사의 삶이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더 큰 유익이 될 것은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아주 급박한 경우에는 학교 교무실로 연락을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번도 그렇게 급박하게 학교 교무실로 전화를  만한 일은 없었다. 돌아보니 조금만 신경을 쓰면, 미리 확인하고 소통할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고, 굳이 묻지 않고불편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으면  만한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다. 여기에도 스마트폰은 존재했고, 카톡 같은 메신저도 넘쳐난다.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즉각적으로 나의 원함을 위해 연락을 취할  있고, 요구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가 그러길 원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학교가 수시로 문을 닫고 열고 하던 지난 2 동안도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꾸준히 고수했다.

메일과 편지라는 조금은 시대 뒤떨어지고 느리고 간접적인 수단을 여전히 애용하면서,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지켜가고 있었다.


서로에게 느슨하게 연결되어 너무 많은 무거움을  지우지 않는, 그래서 정말 해야  본질적인 일이 부수적인 일로 말미암아 침해받지 않도록 그들은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려 들지 않고 그러나 도리어  거리를 지켜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의 하루가 궁금하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적혀 있지 않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하루였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들의 입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학교 생활을 알 길이 없으니 방과 후 간식 시간이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아이들에게 묻기 바쁜 엄마가 됐다.


때론 내 부주의로 노란 공책에 적힌 공지를 놓쳐, 아들이 소풍에 간식 없이 물만 달랑 들고 간 날도 있었다. '엄마 나랑 한 친구만 간식이 없었어.' 아들의 푸념 섞인 말 앞에 참으로 미안하고 얼굴이 화끈댔더랬다. 그런 부주의한 실수들 속에서 아이들도 나도 이 불편하고 느슨한 시스템에 쉬이 적응했다. 이제는 기억력이 쇠퇴 중인 엄마를 위해 아이들이 중요한 일이 생기면 노란 공책을 들고 며칠에 무엇을 해야 하노라며 엄마에게 알려주곤 한다. 얼른 달력에 적으라며 채근하기까지 한다.



빠른 사회로부터 느린 사회로 영입되어, 전체 문자  통이면 간편할 일을 이렇게 느리게 융통성 없이 행하는 프랑스 학교의  복판을 거닐며, 이런 거리감이 어쩌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니까. 설사 그가 선생님이라고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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