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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하 Feb 26. 2023

신대륙 정착기 1 (첫 이틀)

소고기, 첫 출근, 거미줄


2월 15일 수요일


태어난 지 백여 년 밖에 안된 남쪽 나라에 도착했다. 듣던 것보다 덥지 않고, 사람들은 친절하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의 (아마도) 중국계 직원은 우리 가족의 짐들을 국내선 항공기에 실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개수가 초과된 거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공항 내 터미널 간 이동 버스에는 두 젠틀맨들이 내 어린 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줬다. 고마워라.

그렇게 국제선과 국내선을 타고 약속된 남쪽 땅에 도착했다. 계절이 한국과 반대라 여름의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피부질환 발병률 1위인 나라라더니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웠다. 아까는 실내라서 크게 덥지 않았나 보다.


임시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식사 겸 장을 보러 나갔는데 동네 식당 평균 가격이 요리당 만오천 원에서 이만 원 정도다. 베트남이나 일본 현지에서는 몇 천 원이면 사 먹는 쌀국수나 규동을 두 배가 넘는 가격을 내고는 못 먹겠다 싶어서 관뒀다. 짜장면 한 그릇에 삼만 원쯤 한다는 북쪽 나라들 보다야 나은 물가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우리 네 식구가 맘 편히 사 먹을 가격도 아니었다.


대신 바로 옆의 대형 슈퍼에 가서 이 나라가 자랑하는 소고기를 저렴하게 사고, 일본 쌀(한국 쌀은 없었다)과 소금, 식용유 등을 샀다. 너무너무 배고파서 슈퍼 옆의 말레이시아 식당에서 할인가로 한팩에 육천 원쯤 하는 몽골리안 비프 도시락과 블랙페퍼 비프 도시락을 샀다.


역시 어느 도시에 가든 주변 물가와 비교해 저렴한 식당은 피해야 하는 건데, 잊고 있었던 교훈을 다시금 상기했다. 애들은 다 안 먹겠다 못 먹겠다 해서 혼자 오기로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내가 왜 이 먼 땅까지 와서 그것도 첫끼니로 이딴 걸 음식이랍시고 먹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요리가 앞으로 이 나라 삶의 복선인가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구워 먹은 소고기는 다들 맛있게 먹었다. 이 나라 소고기는 대부분 목초비육이라 곡물비육하는 한우 먹던 우리 입맛에는 안 맞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냄새도 없었고 질기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니 우리 집에서 한우 먹는 날은 일 년에 몇 년이 안되니 당초에 비교할 맛이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2.16 목요일


직장 동료가 아침에 픽업하러 와줬다. 무너뜨리고 새로 지을 계획이 있다더니 넓기만 한 지사 건물은 노후화된 채 방치된 건지 건물 밖에는 자세히 보면 거미줄이 곳곳에 가득하고, 건물 안 까펫 여기저기에는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얼룩이 널려있다. 내 방에는 욕조가 딸린 널찍한 화장실이 있는데, 동료 말로는 청소하지 않는 공간이니 정말 싸고 말 것 같은 순간이 아니라면 다른 층 화장실을 쓰라고 한다. 허 참. 싸고 말 것 같은 순간이 오지 않길 빌 밖에.


직장 동료들에게 인사를 돌고, 업무 관련 설명을 들었다. 그전에도 이미 몇 차례나 경험한 해외근무인데, 한 이년 한국에 있다가 나왔다고 처음 해외 나온 것처럼 새롭다. 대략적인 감상은 내 할 일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는 거고, 관리직도 아니고 실무진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서 일을 하게 되겠구나 아니 둘 다 하게 되겠구나라는 예감이었다. 뭐 하루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는 여기 방식대로 해주지 뭐.


보통 해외 근무 첫날은 동료든 상사든 점심을 같이 했었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다. 역시 선진국인가. 구글 맵으로 가장 가까운 매점을 찾으니 걸어서 25분 거리다. 차가 없으니 걸어가야지 싶었는데, 땡볕에 피부가 너무 따갑더라. 왜 다들 차 몰고 다니는지 알겠다. 그렇게 찾아간 편의점에서 아보카도 치킨 샌드위치를 무려 약 오천 원을 주고 사서 다시 삼십여분을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여 이거 여기 생활도 만만치 않겠다.


직장 동료의 안내로 은행 계좌를 만들고, 휴대폰을 개통했다. 분명 선진국이라고 들었는데 인터넷이 계속 끊긴다. 지사가 있는 지역이 오래된 지역이라 기지국이 제대로 없어서 그렇다는 설명인데, 통신사가 다른 내 처의 휴대폰은 인터넷이 잘만 된다. 음..


애들 학교 인터뷰는 내일 보기로 했다.


음… 전임자들로부터 살기 좋고 일하기 좋은 나라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고작 이틀 만으로 판단하기는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아직은 약간 갸웃한 느낌이다. 관리와 실무를 다해야 할 것 같은 업무환경도 모바일인터넷도 잘 안 터지는 생활환경도 익숙해지는데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이되도 제 얼굴에 책임 안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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