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여 벌써 몇 편을 버렸다.내 이야기를 쓰다 보니 무슨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의 회고록처럼 되어 버려서 당초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하고 싶다는 목표와 너무 멀어져 버린 글들이었다.
지금 영어 때문에 고생하고 고민하는 독자들이 듣고 싶은 건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책을 봐야 하는지 어학연수는 꼭 가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십수 년 전 영어 때문에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그 이후로도 수년간을 영어로 인한 열등감을 등에 지고 살았던 20대의 나였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내가 어떤 실패를 겪었고 어떻게 극복했냐는 이야기보다는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더 급했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댓글로 질문을 남겨주면 최대한 성의껏 구체적으로 답변하겠다.
질문 1.영어를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조언을 하려고 하는가.
(답변)내가 영어를 엄청나게 잘해서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때 영어를 포기했었다가 지금은 영어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어에 대한 깊은 열등감을 극복한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외국에서 초중고를 나왔거나, 어학연수를 경험했거나, 아예 원어민이라서 영어를 잘하는 거였다면, 나부터도 영어를 어떻게 하라마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들도 내 이야기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권에서 초중고를 나왔다면 영어를 잘하는 게 당연하게 보이고, 어학연수까지 다녀왔으면 어느 정도 하는 게 당연해 보이고, 영어권 외국인이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영어권 외국인으로 태어나라고 할 수도 없고 출발선부터가 다른데 어떤 조언을 기대하겠나.
나는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도 없고, 취업하기 전까지 외국에 나가본 일도 없다. 외국어에 특화된 고등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대학 입학 전까지는 수능 영어를 공부한 게 전부였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영어로 회의, 토론, 보고서 작성, 가끔 강연 등 업무를 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내 얼굴에 금칠하기 같은데 영어권 외국인들은 보통 미국이나 영국 어느 동네에서 공부했냐고 물어보고 비영어권 외국인들은 미국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영어권 외국인들한테는 네이티브는 아니지만 자기네 동네에서 오래 공부한 외국인 수준으로 보이는 것 같다.
질문 2.토플 만점, 토익 만점 같은 인상적인 스펙 없나? 같은 분야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 영 임팩트가 약하다.
(답변)없다. 다만 십수 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에 본 토익 시험에서 500점대 점수가 나왔었고 그로부터 4~5년 후 재입학해서 한창 영어에 빠져 살았던 때 본 토익 시험에서도 몇 개 틀렸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좀 붙었을 때 졸업 자격 취득을 위해 봤던 토플에서도 몇 개 틀렸었다.
남들만큼 단기간의 극적인 변화나 임팩트 있는 점수는 아니지만,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왔다. 영어 관련 조언을 하는데도 점수가 필요하다는 걸 진즉에 알았다면 토익이든 토플이든 만점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시험을 다시 봤을 텐데 아쉽다.
질문 3.영어 잘하고 싶은데, 뭐부터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되나
(답변)당신이 처한 상황과 당신의 영어 수준에 따라 다르다.
다만,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영어가 본질적으로 언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기초가 부족해서 말 한마디 알아듣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혼자서 공부를 해서 듣고 말할 준비를 하면서 인풋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지만, 기초 정도는 다져서 토익이든 텝스든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는 지점부터는 아웃풋에 더 집중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나눠보자면, 그때그때 필요한 공부를 하면 된다.
1)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의 경우에는 수능이든, 취업이든 이미 주어진 명확한 목표에 맞춘 공부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경우 고등학생 때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이렇다. 일단 듣기와 독해 문법 문제 중에 약한 부분이 듣기라고 진단을 하고, 하루에 2시간씩 영어테이프를 듣고 다녔다. 어차피 익숙하지 않아서, 단어든 문법이든 몰라서 안 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스크립트와 설명이 따로 책으로 있는 영어 듣기 평가 테이프를 계속 들었고 모르는 단어나 문장은 스크립트를 보며 공부했었다.
2) 경력단절 등의 사유로 한동안 영어에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재취업이나 복직을 위해 다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면 영어 실력이 있었는데 감을 잠시 잃어버린 거니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쯤 영어 뉴스 정도 듣고 다니면 금방 살아난다.
3) 자영업자라면, 자기 일터에서 필요한 영어 공부로 시작하면 된다. 예컨대 여행영어 책 보면 레스토랑이나 식당 등에서 쓰는 영어를 대화 형태로 해 놓은 부분이 있을 거고, 거기에서 점주 입장에서 손님맞이할 때나 주문받을 때 하는 영어부터 공부하면 된다.
4) 돈도 많고 시간도 많아서 또는 생업과 별로 상관이 없어서 영어공부가 생계 차원에서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자존감이랄까 교양이랄까 그런 목적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취미생활이든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게 흥미도 지속돼서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다.
수준에 따라 보자면, 자기 수준에 맞게 스킬 트리를 타면 된다.
1) 수능 영어 점수가 안 나오는 수준이라면, 점수가 안 나오는 원인이 기초문법인지, 단어인지, 듣기인지 아니면 총체적 난국인지를 진단해보고, 진단에 따라 분야별로 가장 쉬운 책부터 공부하면 된다. 진단은 어떻게 하나? 자기 수능 모의고사 영어 점수든 내신 영어 점수든 보면 자기 위치가 딱 나온다. 거기서 그치면 안 되고 청해, 독해, 문법 등으로 세분화해서 내가 많이 틀리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거기서 더 나가면 예컨대 독해에서 내가 약한 주제가 과학, 사회, 문학, 철학 등등 중 어딘지 찾아서 그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2) 수능 영어 수준은 벗어낫는데 토익 등 일반 영어시험 점수가 예컨대 토익이라면 700점이 안 나오는 수준이면, 영문법, 단어, 독해, 듣기, 쓰기 등 전반적인 영어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신입생 때 딱 이 수준이었다. 이 구간에 대해서는 밑에 별도로 상술하겠다.
3) 토익 900점 정도 넘으면 이제 영어의 기초 정도는 쌓았다고 본다. 어떤 통계나 학술연구에 기반한 게 아니라, 단지 내 경험 상 대학교 영어 수업을 아직 열등생이긴 했으나 어떻게 꾸역꾸역 막 따라가려고 하기 시작했을 때 받은 점수가 토익 900 정도였다. 이때부터는 회화든 독해든 작문이든 더 깊숙이 들어가서 토론이든, 원서든, 에세이 라이팅이든 공부하는 게 좋은데, 더 높은 점수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시험공부를 더 해야지.
4) 나는 ABCD도 모르겠다는 분은 ABCD부터 공부하시면 된다. 나도 그랬다. 그다음엔 어떡하냐? 시중에 나와있는 '기초', '왕초보'라는 책으로 공부를 시작해도 되고,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내용을 따라가는 것도 추천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영어 기초가 없어서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다시 봤었다. 수능은 다가오고 시간도 부족한데 기초부터 다지면 시간 낭비 아니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내 답변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발짝씩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결국은 제대로 가는 길이라는 거고, 기초를 무시하고 앞으로만 나가면 시간 때문에 무시한 그 기초 때문에 금방 벽에 막힌다. 답변의 신뢰성을 위해 첨언하자면, 고2초에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보기 시작했는데, 고3 모의고사와 수능을 다 포함해서 틀린 문제가 거의 없었다.
질문 4. 나는 수능 영어 수준은 벗어낫는데, 영어시험을 보면 중간 정도 점수밖에 안 나오고 대체 뭘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한다.
(답변)내가 영어로 수업하는 학과에 들어가 대학 수업에 적응을 못해서 방황하던 시절에 딱 그 정도 영어실력이었다. 대체 뭘 공부해야 할지 몰라서 여기저기 두리번대다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그때의 나에게 조언할 수 있다면 내 상황에 맞춘 공부를 하라고 할 거다. ‘못 알아들어도 다 출석하겠다.’ , ‘영어 수업을 따라가겠다.’, ‘수업에 사용되는 책과 자료를 모두 읽겠다.’ 이런 상황적 필요에 대응하는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당시 이러다간 인생 망하겠다는 위기감에 영어 실력이 너무 절박하고 절실해서 정도가 아닌 길에 빠졌었다.
내 수준이나 상황, 목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려들었었다. 막연히 ‘영어를 잘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어차피 수업은 못 알아들으니 가볍게 포기했고 ‘일주일 안에 영문법 마스터하기, 30일 안에 영단어 정복하기, 60일 만에 영어회화 고수되기, 미국 영화로 영어 걱정 해결, 책 한 권으로 영작문 끝내기, 미국 문화를 알면 영어가 보인다, 누구누구는 어떻게 영어를 정복했나.’ 등등. 유혹적이지만 현실성은 부족한, 단기간에 실력을 뻥튀기시켜준다는 또는 본질적으로 영어실력과는 상관성이 적은 곁가지를 강조하는 판타지 같은 책들에 빠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를 무슨 필수 생존 키트처럼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과 열등감을 자극하면서 큰 투자 없이 단기간에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현실성 부족한 과대광고였는데,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겉만 달콤하고 속은 시커먼 그런 책들에 희망을 걸었다.
독자들께서는 부디 본인이 처한 상황적 필요와 자기 수준에 대한 냉정한 진단에 기초한 공부를 하길 바란다. 다른 상황적 필요가 없다면, 역시 남들 다보는 영어 시험이 가장 좋은 시작점이라고 본다. 남들 다 보니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실력도 가늠할 수 있고, 문제풀이로 자기가 어떤 부분에서 약한지 강한지에 대한 자기 피드백을 통한 자가 교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질문 5.나는 토익이나 토플은 거의 만점이고, 영어 회화에도 큰 지장이 없다. 여기서 뭘 어떻게 더 공부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답변)답변부터 하자면, 상위 스킬을 연마하면 된다. 회화에서 발표와 진행, 토론, 연설 등으로 스킬 업하기 위한 공부를 하면 되고, 작문에서는 에세이나 보고서, 연설문 작성 등으로 스킬 트리를 타면 되고, 독해라면 좀 이해하기 버거운 원서에 도전해 보면 좋다. 아직 상위 스킬을 찍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싶다면, 이제는 뉴스, 신문, 유튜브, 독서 등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을 영어로 하면서 기본 스킬 레벨업을 시도하는 것도 좋다.
실은 나도 이때가 공부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차오른 상태라 자기 실수나 약점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가 어려웠고,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남의 지적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당시 나는 에세이 스킬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첨삭 강의를 들었었다. 선생님이 새빨갛게 칠해놓으신 내 글을 보면서 외국어가 기본 스킬로 장착되고 나면 결국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논리와 설득력, 콘텐츠 싸움이 된다는 걸 배웠다.
다음 편에는 아래 질문에 답변해 볼 생각이다.
1. 어학연수를 꼭 가야 한다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된다. 어떻게 하나?
2. 내 영어 발음 때문에 외국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발음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