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처럼 다가온 사람이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느새 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요즘 다섯 살 둥이는 백설공주와 콩쥐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책을 펼치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결혼했어?” 하고 물어올 법도 한데, 아직 그런 데엔 별 관심 없다. “그건 안 궁금해. 빨리 책 읽어줘!”라고 재촉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도 궁금해하겠지.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함께 살게 되었는지. 그때가 오면, 나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평범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던 이야기야. 너희가 나올 줄은 몰랐던, 우리 가족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이었지.”
서른넷의 여름, 보슬비가 내리던 서울 삼성동의 한 일식집에서 나는 남편을 만났다.
“유선아, 우리 사촌 오빠 한 번 만나봐. 서른여덟이고, 배도 거의 안 나왔어. 진짜야. 회사도 괜찮고, 팀장이고, 경제력도 나쁘지 않아. 뭐랄까… 되게 무난해. 그냥 밥 한번 먹는다고 생각해봐.”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가 정성껏 소개해준 자리였지만, 솔직히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밥 한 끼 먹는 자리라 생각하고 나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서른여덟의 팀장님이 이미 와 있었다. 일자 앞머리, 스프레이로 정성껏 띄운 뒷머리, 제법 값나가는 코스 요리까지. 모든 게 갖춰진 듯한 첫 만남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 술은 안 마셔요.”
(남편은 속으로 경악했다고 한다. 이 좋은 안주에 술을 안 마시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뒤로 우리가 함께 마신 소주만 해도 셀 수 없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금 어색했고, 아주 조금 재미있었다.
첫 만남은 그럭저럭 그렇게 지나갔다. 기대도, 특별한 감정도 없이.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는 꽤 적극적으로 연락해왔다.
두 번째 만남. 이번엔 카페에서 시작해 세계 맥주를 마시며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맥주의 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문득 느꼈다.
‘이 사람, 의외로 유쾌한데?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분이구나.’
마치 심심해 보이던 책표지 뒤에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즐겁게 마무리된 두 번째 만남이었다.
대망의 세 번째 만남. 우리는 단둘이 소주를 무려 여섯 병이나 마셨다.
여섯 시간 동안 끊이지 않던 대화. 하지만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과 말 사이, 시선과 시선 사이에서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돼서 참… 좋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긴 남편은 여전히 장난기 넘친다. 둥이를 시도 때도 없이 약 올려 울리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아내의 짜증을 자주 불러일으킨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그의 특별한 재능.
“돈 많은 줄 알고 결혼했는데 아니었지? 어떡하냐, 속아서 결혼해서.”
이쯤 되면 웃어야 할지, 등을 한 대 쳐야 할지 헷갈린다. 게다가 남편의 지인들이 “와이프랑 왜 결혼했어?”라고 물으면, 남편은 꼭 이렇게 대답한다.
“왜 결혼했냐고요? 얼굴 보고요. 성격 봤으면 다시 생각했을지도요.” 달콤한 듯 애매하고, 유쾌한 듯 찝찝한 말. 아내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농담 같지만, 어쩐지 진심이 묻어나 있어 기분이 묘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조금씩 맞춰가고, 다투고, 다시 웃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이제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소행성이 만나 하나의 우주를 이루며,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얘들아, 너희를 세상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아빠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야. 엄마에게는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더 궁금해지는 소설책 같았어. 너희에겐 동화책처럼 신나고 궁금한 이야기로 가득한 사람이겠지? 이제부터 아빠랑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다음 장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엄마도 참 기대돼.”
어쩌면 삶이란, 누군가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그 사람의 책장을 함께 넘겨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론 웃고, 때론 멈칫하며, 서로의 페이지를 읽고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것.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책이 되어간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조심스레,
서로의 이야기를 새기며.
-김유선, 『엄마로 자라는 날들』의 일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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