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불혹의 연차 때우기
'아차... 내일이구나'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창고 속 먼지 쌓인 캐리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큰 놈이 좋겠어!'
나름의 고심 끝 결정은 가져갈 짐이 아니라 가져올 짐을 위한 대비였다. 누군가의 기대를 조금이라도 충족시키기 위한 이런저런 것들은 꼭 예상을 넘기기 마련이니까. 질질 끌고 나온 캐리어를 거실에 펼쳐놓았다. 나의 어깨는 이미 큰일을 해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으쓱 올라갔다.
'시작이 반이니 그럴 만도 한 것 아닌가?'
자칫 열심을 낼 뻔한 나를 일깨워준 어깨에 감사하며, 빈둥거리는 중이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소파에 다시금 몸을 맡긴 채 내일이라는 놈이 눈치를 줄 때마다 생각나는 것들을 던져 넣었다. 어느새 상당한 것들이 쌓여갔지만, 불쌍한 캐리어는 아마 출발 전까지 닫히지 못하고 방치될 예정이었다. 아마도,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해서 당하는 것보다 다소 모양 빠지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은, 이 녀석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뒤통수가 따가운 것 같은 착각과 미안한 마음은 대충 접어두고 예정대로 누울 장소를 침대로 옮겼다. 나머지는 내일과 마무리하면 될 일이니까.
'잠이 안 오는 것은 분명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나를 더 이상 눕자마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변종으로 만든 세상이 원망스럽다. 빛이 수면에 해롭다는 상식을 알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건만 소용이 없다. 3분도 안 되는 영상들이 꼬리에 꼬리에 물며 한참을 나를 뒤척이게 만들었다. 보통이라면 한참을 더 유해한 반짝임과 씨름해야 할 것이지만, 내일이라는 녀석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만성피로의 주범을 움켜쥐고 애써 눈을 감아본다.
아무도 빛의 시간을 알려주는 이가 없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모아 기다리던 그날의 아침이 문득 생각났다. 분명 그때 나는 거침없이 뛰던 심장과 또르르 내리던 눈물을 가진 남자였다. 지금 나의 심장은 수십 년간 열심히 일한 탓인지 더 이상 오버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뿐이다. 심장이 출력을 낮춘 탓인지 눈물공장도 정상 가동한 지 오래되어버렸다.
'부스럭부스럭'
잠시 눈을 떠서 구겨진 인쇄물을 꺼냈다. 남은 연차를 때우기 위한 선택도 별 고민 없이 클릭 몇 번만 하면 해결되는 세상이다. 패키지라는 이 아름답고 편리한 것을 이제야 경험하는 내가 시대에 뒤처진 것인지 앞서 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더 늦기 전에 날짜와 시간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일정과 준비물 등을 확인해 본다. 몇몇 빼먹은 것들이 보이지만 역시 내일이랑 하면 될 일이다.
마음이 편해졌는지 눈이 스르르 감긴다. 딸깍 몇 번으로 고생을 줄인 만큼, 이번에는 심장이 열심히 일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숨소리를 낮추고 그날의 바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내일이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