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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킴 May 15. 2021

추억 일기 : 延吉 故事 17

간도間島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간도지역이 바로 연길을 중심으로 펼쳐진 길림성 동남부 지역으로 연변자치주도 결국은 간도의 일부분이다.

간도는 오래전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가 발행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고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으며 그들이 생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도록 북관개시北關開市를 열어 주기도 했었다.

여진족은 농경보다는 유목, 수렵에 종사하였고 간도를 농경지로 개척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간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말 이후로 학정과 수탈에 지친 농민들이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다고 한다.


자치주에 속한 연변은 북간도北間島로 알려진 곳이다. 간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니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이주 금지지역으로 정하고 원래 두만강 대안인 북간도는 청淸나라 태조太祖가 일으킨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사람들의 입주를 금한 곳이다. 이것을 봉금령封禁令이라 하는데 청국인과 조선인 모두 입주를 불허하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만들었고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봉금령이 해제된 것은 1870년경 러시아군이 동부로부터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면서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서침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내에서 중국인의 이주와 두만강 대안에 있던 조선족의 유입을 장려한 것이다. 봉금령이 해제될 무렵, 1869년 한국에는 ‘기사기아己巳飢餓’가 일어나 한인들이 대거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정주하였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북간도라 하였다. 간도란 강에 둘러싸여 있다는 의미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두만강 대안對岸을 북간도, 압록강 대안을 서간도라 하기도 한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면서 농토를 착취당한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였고 1926년 자료를 보면 간도 지역에 중국인 호수가 9천여, 조선인 호수가 5만천여 호였다.

이처럼 조선 백성들의 한을 품은 항일 터전은 일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독립운동 전진기지로 활약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주춤거렸고 1945년에는 중공군들에게 점령을 당했고 1952년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면서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돈화 등으로 지역을 형성하였다. 그 중심에 연변자치구가 있고 수도인 연길이 있다.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동포들 중에는 적지 않은 숫자가 그 옛날의 개척과 항일의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산아제한, 그리고 한국 내 취업활동 등으로 연변자치주 조선인학교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부디 일송정 푸른 솔을 바라보며 해란강에서 말을 달리던 선구자先驅者의 후손들임을 잊지 마시라.

나는 지금도 선구자를 듣거나 부를 때면 괜스레 신산하고 장엄했던 그 시절 독립투사들의 비장함이 느껴지곤 한다.


선구자

윤혜영 작사, 조두남 작곡인 선구자는 한국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가곡이다.

1960년대에 이 노래가 각광을 받자 조두남은 회고하기를 자신이 20세 무렵이던 1933년경 북간도 용정의 여관에 머물고 있을 적에 어떤 동포 청년이 은밀히 찾아와 자신은 독립운동하는 밀사라 하면서 시 한 편을 건네 왔다고 한다. 한참 뒤에 조두남이 곡을 붙였고 그 뒤 그 청년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는지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다. 곡조가 워낙 장중하고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던진 독립투사와의 만남을 묘사하기도 하여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1970년~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 시기 때 자주 애창되었다.


해란강海蘭江

북방지역의 명칭을 만주어로 음차 하였는데 해란강의 해란海蘭은 여진어로 느릅나무이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가면 느릅나무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변인민출판사판 『당대중국조선족연구』에 따르면 이런 설화가 쓰여 있다.

“강변에 '해'와 '란'이라는 조선인 오누이가 살았는데 두만강 건너 외가에서 볍씨를 가져와 어른들에게 심게 했다. 그 뒤 강변은 논으로 개척되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자 오누이가 산기슭을 헤쳐 샘물을 찾아내고 물길을 내니 그것이 강이 되었고 그래서 해란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택동 毛澤東(1893.12.26-1976.9.9) #3


1919년 5·4 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를 당하자 베이징으로 도망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 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0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다.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오는 후난에서 당을 건설하라는 지침을 받고 1921년 8월 창사로 돌아왔다. 이후 마오의 활동 범위는 급속하게 넓어졌고 당 조직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 마오는 정신적 아버지였던 양창지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1922년 10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태어났고 1923년 11월에는 둘째 아들 안칭岸靑도 태어났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 중앙 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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