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이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 - 협동의 네 가지 조건
얼마 전에 아는 분들과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협동조합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 사회적 활동을 해오신 선생님께서 이번에 새롭게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 협동조합 형태로 해볼까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내게 협동조합으로 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시길래 나는 두 팔로 X자를 그리며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협동조합은 아닙니다!
그간 줄곧 사회적 경제 영역에 있으면서 협동조합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특히 5명만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고 한 뒤부터는 주변에 협동조합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협동조합이란 단어가 주는 착하고 바를 것만 같은 느낌에다 정부에서 협동조합이 무슨 만능열쇠인 마냥 조합을 만들면 알아서 사업이 될 것처럼 광고를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중에 만나서 물어보면 잘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협동이 잘 안 된다는 거였다. 협동조합인데 협동이 안 된다니. 사실 옆에서 보면 협동조합의 의의와 장점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 하지만 가장 중요한 협동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협동이란 게 말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냐 마는 협동은 그냥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협동이 잘 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의 성패는 사실 거기에 있다.
협동이 잘 되는 조건이란 게 뭘까? 나도 궁금했던 차에 이번에 덴마크에 다녀오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됐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덴마크는 협동조합이 무척 발달한 나라다. 그들이 가진 협동조합의 역사와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협동조합에 관심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정리를 해본다.
1. 협동은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협동이 잘 되려면 협동의 목적과 지점이 명확해서 참여자들이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협동조합을 단순하게 보면 협동을 통해 비용(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협동의 분야가 생산이라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소비라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상태에서 서로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협동을 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수요나 공급에서 협동할 부분이 명확하지 않은 데 일단 모이면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는 경우 협동이 잘 될 수가 없다.
특히 사회적인 목표 - 이윤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나 스스로 결정권을 갖는 것 - 을 앞세워서 명확하지 않은 협동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회적인 목표도 어디까지나 협동이 잘 될 때 의미가 있고 가능한 이야기다.
2. 협동은 처지가 비슷해야 한다.
협동이 잘 되려면 고민하는 문제가 같아야 할뿐더러 생활권이 가까워야 하고 현실에서 처한 구체적인 조건- 일의 종류는 물론 소득 수준과 관심, 능력 등- 이 비슷해야 한다. 한 마디로 처지가 비슷해야 한다.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아야 협동이 잘 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사회가 엄청난 속도로 변했기 때문에 세대, 지역, 계층에 따라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다르고, 특히 도시는 사는 곳과 일터가 분리되면서 커뮤니티 자체가 희박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주변을 보면, 특히 사회적인 목적을 가지는 경우, 처지보다는 목적에 동의하는 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되어있다.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협동을 할 때마다 매번 서로의 다른 상황을 맞추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면 자연히 협동은 줄게 되어있다. 또 처지가 다르면 큰 그림은 비슷할지 모르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서로의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협동이 자연스럽게 유지되려면 의지가 아니라 처지가 비슷해야 한다.
3. 협동은 개개인의 성과가 객관적으로 보여야 한다.
협동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핵심은 결과물(이익)에 대한 공정한 분배이다. 사람들은 구성원들의 정직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만큼이나 협동의 과정에서 각자가 제공한 양이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가 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가 농업이다. 협동으로 오렌지주스를 만들었다면 오렌지를 공급한 양만큼 가져가면 되고 치즈를 만들었다면 우유를 공급한 양만큼 가져가면 된다.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갈등이 없다.
농업이나 제조업은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 문제는 서비스와 정보, 문화예술 등 무형의 생산물들이다. 구성원들의 성과를 측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으면 서로가 제공했다고 생각한 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면 협동을 계속할수록 갈등과 불만이 생기기 쉽다.
일단 서비스 중에는 시간이나 작업량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택시다. 택시는 일한 양이 미터기라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확히 측정되기 때문에 협동을 하기가 수월하다. 협동조합 택시가 잘 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표준화된 서비스가 아니면 일한 양을 계산하기가 어렵다.
제일 측정이 어려운 것은 미디어 콘텐츠, 예술 창작물들이다. 결과물이 만들어낸 가치의 양을 측정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협동 과정에서 개인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평가하기도 어렵다. 특히 양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가치를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대표적인 예술 협동조합이 밴드인데, 해본 사람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경우 협동의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투명하고 공정한 협동은 단순히 마음가짐이 아니라 산업의 특성과 객관적인 기준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4. 협동조합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의 핵심을 민주적인 운영으로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1인 1표 제도다. 그런데 나처럼 이 1인 1표의 실제 효과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나?
내 주변에서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경우를 보면 1인 1표를 지키기 위해 여러 조합원들에게 각종 연락과 문자 보내기 바쁜 사람부터 그냥 현실적으로 리더그룹끼리 알아서 결정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어느 쪽이 맞는가를 떠나서 확실한 건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두 모은다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1인 1표는 종종 협동을 불편하게 한다. 특히 사업에선 의사결정이 느려지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그게 더 옳은 것이니 지켜야 하는 것일까? 내 눈에 비친 협동조합은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사회적인 정신을 지키기 위해 있는 조직이었다. 아마 덴마크에 가서 사람들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 오해를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덴마크 사회의 핵심은 평등이다. 사람들은 흔히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는 일하려는 의욕이 떨어져서 가난할 거라 생각한다. (어릴 적 배운 반공 교육 덕분일까?)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사회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덴마크는 인간으로서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다.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보는 시각은 오히려 높은 효율성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건 못 벌건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던 무엇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각자 서로가 하려던 일과 생각에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평등은 효율의 바탕이었다.
평등은 협동조합의 바탕이기도 했다. 함께 모여있는 것이 핵심인 구조에서는 누구라도 소외받지 않는 분위기가 무척 중요하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규모가 커질수록 이득인 게 협동조합이다. 만약 덜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진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불편한 사람들은 협동에서 빠지게 되고 협동이 줄 수록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평등은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협동조합의 유지를 좌우하는 매우 현실적인 요소다.
여기서 중요한 건 평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게 되면 민주적인 의사 결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평등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것이다. 일반적인 회사라고 해도 구성원들이 모두 평등에 대한 의식을 가졌다면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협동조합은 현실적 요소고 회사에겐 의식적 요소라는 차이는 있지만.)
1인 1표는 가진 게 많던 적던 서로 평등해야 협동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의 상징이다. 그런데 평등을 통한 민주적 운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1인 1표는 상징이 아니라 규칙이 되어버렸다. 1인 1표라는 제도로 사람들이 모이면 알아서 민주적으로 운영이 될까?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협동조합을 해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협동조합의 본질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을 확률이 크다. 협동조합을 말하기에 앞서 평등, 협동, 효율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에겐 협동조합에 앞서 일단 협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협동은 사람의 의지만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건과 환경을 잘 이해해야 가능하다. 덴마크는 긴 시간 동안 이런 협동의 요소들을 경험하면서 사회적으로 신뢰를 쌓아왔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협동에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와는 수준도 환경도 다르다. 나는 협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정말 많지만 묵직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다음 편부터는 다시 여행기를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