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더 차갑게 고립되어 가지만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품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쉽게 지나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이 공감을 삶의 본질로 여긴다. 이처럼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정의란 자신의 몫을 정확히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고통에서 구하는 것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중에서도 누군가의 고통에 특별히 주목했던 이가 있다. 퇴계와 다산을 잇고 가르며 조선 후기 새로운 학풍을 열었던 성호 이익이다.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
성호 이익은 1681년 아버지의 유배지였던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숙종 대 요직을 거친 남인계 중진이었던 부친 이하진은 남인들이 실각했던 경신환국 때 유배되었다가 복권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막내아들 성호를 남겨둔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호에게 아버지이자 스승 역할을 한 것은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두 형들이었다.
병약했던 성호를 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만든 힘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 숙종 4년이던 1678년에 연행을 다녀온 부친 이하진이 북경에서 황제의 은사금으로 사 온 수많은 책들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성호는 서학서를 비롯해 당대의 다양한 지식들을 토대로 독자적인 학풍을 발전시켰고 그의 문하에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성호학’을 열었다. 가난과 병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지만 현세의 부나 명예와 바꾼 학문적 성취와 그를 이은 제자들은 ‘성호 이익’이라는 이름을 미래에까지 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학문적으로 성호는 사물과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 원인과 배경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학자였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에는 학술적 엄밀함과는 다른 능력이 작동한다. 그것은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공감의 능력이다.
성호는 당시 조선에서 흔한 풍경이었을, 걸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의 고통에 마음이 아파 ‘눈물이 쏟아질 정도’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애민(愛民)은 유학자들의 공통적 구호였지만 성호처럼 이를 마음으로 공감했던 학자는 많지 않다. 성호는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 전염병에 걸려 마을 밖에서 죽은 사람, 굶주림과 추위에 몰려 도둑질을 하게 된 도둑을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에 음식을 먹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한다. 사회적 불균형과 불합리한 구조가 고통을 사회적 약자에게 가중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성호가 공감하고 연민하는 대상은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제대로 먹지 못해 추위에 벌벌 떠는 병아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그것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할 방법을 생각하기도 하고, 고양이가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필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고양이의 상황을 헤아리기도 한다. 심지어 육식을 하는 인간들의 탐욕을 비판하기도 한다. 닭이나 개를 보고 입맛을 다시며 짐승을 잡아먹을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짐승의 도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성호의 연민과 공감이 제도 개혁안으로 연결
성호가 추위에 떠는 병아리, 살고자 하는 짐승의 처지를 연민하는 것은, 그로부터 백성들의 삶 그리고 백성에 대한 위정자들의 책무 등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성호는 추상적인 관념의 차원에서 국가와 백성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인 고통에 마음으로 공감했던 것이다. 성호는 여러 글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당시의 제도적 모순들을 간파했고, 사회적 약자들이 그 모순의 직접적인 피해자임을 지적한다. 성호는 모든 존재에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들의 삶을 부정하는 외부의 힘을 덜어주고자 한다.
성호는 당시 조선 사회의 최하위층이었던 노비들의 처지를 깊이 연민한다. 성호는 서얼의 사회 진출을 제한하는 서얼금고법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성호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되며 능력에 따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비건 서얼이건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백성의 부모인 위정자의 본질적인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성호의 공감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제도 개선을 위한 비판의 단초 역할을 한다. 그의 연민과 공감은 사회적 모순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호가 제시한 제도 개혁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사유화된 영역을 공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토지제도다. 당연하게도 조선에서 토지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었다. 그러나 소수가 토지를 독점하고 수탈하는 사이 백성들은 점점 가난해질 뿐이었다.
성호는 동전 같은 화폐의 유통도 반대했는데 동전이 돌면 그만큼 사치가 쉬워지고 부의 편중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화폐나 시장을 부정하는 성호의 입장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낡은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근본적인 제안이었다.
이렇게 볼 때 성호의 제도 개혁론은 부국강병이라는 거시적 목표보다 고통받은 약자를 구제하기 위한 실질적인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성호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약자들의 입장에서부터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제도 개혁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정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
그러나 사실 성호에게는 제도를 바꾸어나갈 실질적인 힘이나 권력이 없었다.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 주변에 머물면서도 성호는 자신보다 더 많이 밀려난 존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성호가 목격한 거지 유랑민, 서얼, 노비들은 조선의 타자들이었고 이탈자들이었다. 이들의 존재와 고통은 애민을 주창하던 유가적 이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확인시킨다. 성호는 이 훼손을 간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호의 글 중에는 ‘정의’에 해당하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성호가 고통에 공감하는 방식은 일종의 ‘정의’의 구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확대할 수 있다면 결국 사회적 불균형과 불평등이 해소되고 일종의 정의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호가 제안했던 사회 개혁론은 보편적 배려의 구상이자 정의의 실현을 위한 토대 작업과 같다. 가난한 재야의 선비로 살았던 성호의 삶과 사유는 배려와 정의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과,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