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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하 Mar 31. 2024

나에게 좋은 건 아니구나.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 두바이의 첫날도 시간의 틈 사이에 끼여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밤늦게 도착한 탓에 오는 피로는 그냥 남겨두고 벌어진 시간에 대한 부적응을 즐기기로 했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커튼 사이로 이 도시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아직 밤이 덜 물러난 하늘이 마지막 남은 어둠을 걷어내려는 찰나였다. 선홍색 물감이 풀어진 물통을 엎질러 버린 듯 천천히 색이 변해가는 하늘 아래,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만 같은 허상처럼 과거에 사막이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거대한 도시의 자태가 보란 듯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마천루들이 빗살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부르즈 할리파가 압도적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유리로 둘러싸인 벽면이 하늘의 색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제자리를 찾은 태양에 맞서 막 뽑아 든 중세 기사의 검처럼 번쩍거렸다. 두바이의 마천루를 멀리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뉴욕처럼 가로로 넓게 빌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뉴욕과 다른 점은 곳곳에 크레인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들어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낙타의 발자국을 콘크리트로 메우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209층의 부르즈 할리파와 이 도시를 쌓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본과 기술을 쏟아냈을지 상상이 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세계의 3대 분수 쇼 중 규모가 가장 큰 분수,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인공섬. 두바이에서 보는 눈앞의 모든 것은 거대했고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초대형 인공물은 어디를 가든지 그 규모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축구장의 몇 배라는 부연 설명이 따라왔고, 세상에 가장 값진 것이 금이라면 시장도, 호텔도, 커피마저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도시 전체를 미래 전시장 내지는 실험장으로 바꿔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두바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의 커다란 세트장이었고, 투명 기술을 장착한 자동차들이 지금도 날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해도 나는 설득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너무 절박하지 않아?”    

 

  두바이 여행의 마지막 밤, 남편과 나는 두바이의 분수 쇼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한참을 멍하게 허공 속으로 어지럽게 깨져버리는 물방울을 세고 있었다. 음악과 불빛을 담아 뿜어내듯 솟아나는 물줄기 뒤로 부르즈 할리파가 서 있었다. 이 웅대한 건물 바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자니 그 풍채와 위엄은 어떤 것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사실 두바이는 다른 곳에 비해 석유가 넉넉한 곳이 아니래. 과거에는 현대 산업의 기반인 석유로 부를 가졌겠지만, 곧 그런 자본이 고갈될 것을 알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뤄낸 이 장관. 사치스러움과 과시욕으로 이뤄낸 호화로운 결과물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건 결국, 관광사업과 부동산이 주 수입이 되고 미래 자원을 위해 투자해야만 하는 절박함. 그럴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 모든 것은 어떠한 윤색도 아닌 화려함 자체가 치열한 현실이 되어야 하는 곳. 미화도 아닌 보이는 그대로 모든 것이 아름다워야만 하는 곳. 남편과 나는 두바이를 돌아보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최고라는 것에 대한 감탄보다는 이들이 가진 간절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보러 온 것은 초고층이나 인공물이 아닌 이들이 가진 목표를 이뤄낸 ‘집념’, 절실함으로 무장하고 달려가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오직 모래와 기름의 나라인 줄 알았다. 오랜 시간 전열을 가다듬고 개발과 성장에만 모든 것을 몰두했으리라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몇 층쯤 올라온 걸까?’ 

  도시를 둘러보며 부르즈 할리파가 보일 때마다 나는 눈동자로 한 층, 두 층 부르즈 할리파의 계단을 올랐다. 신기루를 바라보듯 한참을 오르다 보니, 문득 ‘나는 무엇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눈앞에 높은 곳이 있으면 그 끝을 따라 뒤꿈치를 올리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가 외고를 준비한다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자 무턱대고 일본어를 따라 배우기 시작했었다. 수능을 치고는 단순히 원하던 성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수를 선택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들은 어떤 것이 나에게 필요한지 고민 후 대학원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자 바로 대학원에 입학했었다. 

  눈앞의 높은 곳을 쫓다 보니 매일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 그것 또한 성장인 줄만 알았다. 한 층을 더 높이, 더 빠르게 쌓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한 걸음이 처지면 더 큰 걸음으로 계단을 밟아야 한다는 다그침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그런 치열함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져온다. 그러다 보면 나는 ‘어딘가’ 높이 우뚝 서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어딘가’에는 집념이나 의지 같은 것들이 빠져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불분명한 목표 의식에는 간절함을 쏟을 수 없다.

  더 이상 어디로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왔었다. 다시 습관처럼 높은 곳을 올려다보자니 내가 가야 할 대상이 맞는지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내가 어디를 향해가고 있었던 건지, 보고 있는 방향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동안 움직이던 삶이 단순한 관성이었다는 생각까지 머무르자, 마음이 욱신거렸다. 내가 쫓긴다고 여겼던 것들은 질투와 조바심의 감정들로 채워진 환상 같은 것들이었다. 어쩌면 방향을 모르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으면서 내가 모르는 어떤 기준들로 마음만 바삐 살았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부르즈 할리파 전망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가면 가장 멋진 풍경이 기다릴 것 같지만, 단순히 높이 올라왔을 뿐 정작 감흥이 없을 때가 있다. 이들은 허상이나 환상이 아닌 그들이 품고 있는 절박함으로 진짜를 만들어냈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가 올라가야 할 이상이 아니라면 나에겐 모래성일 뿐이다. 새로움과 다른 것을 이유 없이 쫓아가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의 크레인이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적당히 나이를 먹었으니 그저 버젓한 직장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오늘 하루가 평범하지만 중요한 방향인지도 모른다고 가장 편한 결론을 내린다. 다만 내가 해내고 있는 건 더 이상 이유를 모르고 함부로 무언가를 쫓진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단단해지지 못한 나는 가끔 무언가가 여전히 눈부시고 좋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할 대상은 아니구나. 나에게 좋은 건 아니구나.     


   나는 두바이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에 놀라고, 몰랐던 사실을 깨달으며 고개 숙이고, 내가 가지지 않은 다른 것들을 인정하는 풍요를 기꺼이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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