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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Oct 14. 2022

한라산 고사리 냄새가 난다


봄이 되면 제주도 할머니들은 바쁘다. 한라산 중산간 도로를 가로지르는 버스에는 꽃무늬 모자를 쓰고 커다란 가방을 멘 할머니들이 있다. 모두 나의 경쟁자들이다. 거기에 나도 있다. 매년 고사리 시즌이 되면 설렌다.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다. 고사리를 좀 꺾어본 사람이라면 자신만 알고 있는 고사리 스팟이 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비가 온 다음 날은 고사리가 쑥쑥 자라 고개를 내민다. 봄비가 내리면 커다란 가방이랑 모자를 챙기고 다음 날 새벽에 나갈 준비를 한다. 고사리가 가득한 곳을 발견하면 신 봤다!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 고사리를 꺾을 때면 똑똑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좋다.


꺾어온 고사리를 물에 씻고 한번 푹 삶아서 독을 빼야 한다. 한번 먹을 만큼씩 소분해서 얼려두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고사리를 볶을 때는 식용유가 아니고 참기름에 볶아야 한다.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간장으로 간을 하고, (조개 다시다를 넣어야 한다) 일급 비밀이기 때문에 괄호를 쳤다.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꽤 오래 볶아야 한다. 달달 타지 않게 계속 졌으면서 볶아야 한다.


고사리 볶음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난다. 냄새가 익숙하다. 어릴 적 제삿집에 가면 이 냄새가 났다. 제사가 많은 집이었다. 큰아빠네 집에서 제사를 했다. 엄마는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했다. 부엌에 구경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들어가면 분명 혼날 것이다. 나는 멀찍이 앉아서 구경했다. 제주도는 제사상에 떡 대신 빵을 올린다. 단팥빵, 카스텔라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사리 볶음이었다. 부엌을 가득 채운 음식 중에 고사리만 보였다. 냄새도 고사리 냄새만 났다. 제사음식은 차례를 지내기 전에는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침만 꼴깍꼴깍 넘겼다.


차례를 자정에 지냈다. 9시부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3시간을 참아야 고사리를 먹을 수 있는데 벌써 졸렸다. 끔뻑끔뻑 졸고 있으면 엄마가 사촌 언니 방에 이불을 펴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잠들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거실 어른들의 말소리가 웅얼웅얼 들린다. 잠들락말락 하다가 말소리에 깨고, 다시 잠들락말락 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 항상 잠들었다.


깊이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다. 그러다가 제사가 끝나고 아빠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면 잠이 깼다. 내 몸은 이불이 돌돌 말아져 있었다.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서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울 때쯤이면 잠이 다 깼지만 자는 척했다. 그래야만 집에 도착해서 아빠가 한 번 더 나를 번쩍 안아 방에 눕혀주기 때문이다. 양치도 하지 않고,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머리도 풀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아빠가 양말을 벗겨주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입안이 텁텁했다. 양치하고 나오면 아침상에는 은박지에 쌓인 고사리가 있었다.


이런 기억들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이런 기억들에 발목이 잡혀 아빠를 마음껏 미워하지 못한다. 아니면 내가 이런 기억을 억지로 붙잡고 아빠를 이해해보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봄이면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는 건지도 모른다. 고사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고사리가 잘 볶아졌다. 고기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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