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 : Ep.0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의 화투패를 들고 태어난다. 쌍피에 조커까지 가득한 화투패가 주어진 사람이 있다. 손안에 들어온 조커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에 두 손으로 아무리 오므려 봐도, 옅게 퍼지는 미소랄까, 여유로운 몸짓에서 나오는 기운만으로도 그의 손에 들린 패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비광에 12월만 가득한 패가 주어진 사람도 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이기지 못할 게임이란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화투패를 바닥에 장판 위에 휙 던져버리면서 이번판은 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화투패를 집어던지듯 획하고 그만둘 수 없는 법.
각자 주어진 화투패를 들고 어떻게든 용을 써서 이번 게임의 끝을 봐야 한다.
화투에 대해서 잘 알았다면, 나는 태어나서부터 나에게 주어진 화투패가 별로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화투판에 처음 뛰어든 나라는 어린 영혼은 몰랐다. 잔인하리만큼 점진적으로 아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지붕이 파란 단독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차이 나는 언니와, 또 두 살 어린 남동생과 매일 웃고 매일 싸우면서 시끌벅적 지냈다. 그러다 나는 가끔 혼자 옥상에 올라가곤 했다. 옥상에는 장독대가 두 개 있었다. 옆을 지날 때면 꿉꿉한 된장냄새가 났다. 장독대를 밟고 올라가면 파란 기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자주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하고 생각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하품이 나오거나, 꺽 하고 트림이 나오듯이 죽음에 대한 생각이 꺽하고 올라오곤 했다. 중학생즈음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떠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저 속절없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든 일 앞에서도 그저 툭툭 털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일어나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런 빛이 나는 광 화투패가 나에게는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다. 시온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위에서 말한 두 개의 화투패를 모두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녀에게는 쌍피에 조커가 있으므로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아침 자율학습시간이면 급식 메뉴가 짬뽕에 군만두라면서 웃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 갑자기 악기를 시작했다. 악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하프랑 비슷하게 생긴 악기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 갑자기 아테네 여신이 되어 나타난 시온이는 특채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조건중 한 가지가 ’ 악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였다. 나에게는 고가의 악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줄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고만고만한 촌동네에서 그다지 빈부격차를 느끼지 못하고 자랄기에,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비로소 내가 가진 패가 사실 별로였음을 알게 된 순간이다.
어느 날 다이소에서 천천히 구경을 하던 날이었다. 아마 내가 대학생쯤 아니었나 싶다. 빨간 표지에 작은 헬로키티가 그려진 1500원짜리 수첩을 샀다. 네임펜으로 “내가 가진 작은 행복들”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행복들을 하나씩 적어갔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부동산쇼핑을 할 수도 없었고, 옷을 마구 사들일 수도 없었지만, 다이소에서는 뭐든 다 살 수 있는 부자가 되었듯이, 커다란 행복은 없지만 아주 작고 사소한 행복을 모아 보기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저녁 모임이 취소되었을 때
알라딘 중고서적에서 책 주문하기
할리스 아메리카노
짱구분식 떡볶이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비 비린내
폐지가 담긴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는 학생을 볼 때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나서 초록잎이 돋을 때
숲길을 걷다가 만난 청설모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걸어가는 덩치가 좋은 청년
이렇게 적어나간 나의 작은 행복은 작은 행복은 빨간 키티 수첩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러 몇 개의 수첩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이러한 작은 행복이 나의 수첩을 채워나가고 있다.
아이의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
핸드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1시간
맞은편 중학교에서 들리는 농구공이 탕탕 튀기는 소리
퇴근길 ’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묻는 남편
지금 내 앞의 사람과 나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고 느낄 때
난데없이 배를 내미는 이웃집 강아지 뽀삐
빨간 헬로 키티 수첩을 손에 쥐었을 때의 심정은 그저 '패가 엉망인 이번 화투판을 어떻게든 끝까지 견디는데' 목적이 있었다. 화투패를 방석 위에 휙 하고 던지며 '나는 이번 판 쉽니다'하고 기권하지만 않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파란 지붕 집에서 그저 내려와서 매일 싸우고, 매일 웃으며 그저 그렇게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헬로 키티 수첩을 가득 채우고, 나의 작은 행복이 가득 찬 수첩이 이미 여러 권의 되어버린 지금. 나는 그저 버티기 위해 살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데 깜짝 놀랄 만큼 기쁘고 감사하다. 파란 지붕집에서 실수로라도 발을 헛디디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앞으로 '내가 가진 작은 행복들'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리만큼 행복한 그 순간들. 이를테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시답지 않은 농담과 맥주 한잔, 중고책에 밑줄과 함께 옅게 써진 전주인의 흔적, 밖에서 한 시간을 놀다가 집에 들어온 아이의 발냄새에 대해서.
이런 조각난 행복들을 긁어모아 나는 지금의 커다란 행복을 일구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잠깐 깜빡하고 있던 작고 소중한 나의 행복'을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불행한 사람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시리즈는
브런치에 비정기적으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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