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고, 이슬아 작가님의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 동네 롯데 백화점 문화홀에서 오후 5시에 이슬아 작가의 강연이 있다는 현수막을 봤다. 이슬아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건 댓글을 통해서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를 시작한 초반에 누구나 댓글을 달 수 있도록 설정을 해놓았을 때였다.
“이 글을 왜 돈 만 원을 주고 보냐? ㅋ 지가 이슬아도 아니고.”
네이버에 이슬아를 검색해 보았다. 그녀의 삶도, 그녀의 글도 그녀가 글을 쓰는 일을 돈이 되도록 만든 방법도 놀라워서 감탄이 나왔다. 이슬아 작가님은 20대 초반에 누드모델을 했다고 했다. 우선 누드모델은 시급을 많이 받았고, 자신이 수치스럽게 여기던 몸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1차로 그녀는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느꼈다. 1회에 5,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나는 벗은 몸으로 남 앞에 설 자신이 없다. 아니다. 조금 생각해 보니까 1억 정도 일시불로 준다고 하면 벗을 것 같기도 하다. 아아, 아니다. 청심환 두 알 정도를 먹고 옷을 벗었다가 가슴을 양팔로 이리저리 가리고 양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보다가 결국은 흰 가운을 주섬주섬 입고 자리를 피할 것 같다. 아마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오지 않을까. 그마저도 아주 작은 소리로.
조금 더 검색해 보니 그녀는 가수인 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춤을 엄청 잘추는 것도 아니었고, 노래를 유독 잘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서는 마음이 전해진다. 여기서 2차로 그녀와 내가 다른 사람이구나 느꼈다. 어딜 가든 남의 시선을 지독히도 의식하는 나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없다.
남의 시선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박자를 맞추지 못해도, 손동작이 어색해도 무대에서 흔들고 흔들어 보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언제나 상상에 그치고 만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으면 마이크가 덜덜 떨릴 것 같고 한 손은 마이크를 잡고 한 손을 축 내려놓으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코를 만졌다가 머리를 만졌다가 할 것이다. 무대를 즐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활자를 앞세워서 나를 숨길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몸뚱어리를 흔들거리나, 목청을 올리지 않고, 글 뒤에 숨어서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은 이슬아 작가님를 만나는 날이다. 집에서 천천히 걸어도 15분이면 도착하는 롯데백화점에 그녀가 온다. 눈이 오는 날이었고 나는 매년 겨울이면 문신처럼 입고 다니는 검은 색깔 롱패딩을 입었다. 검은 기모바지에, 탐텐에서 파는 기모 후드 모자 맨투맨을 입고, 검은 롱패딩을 입었다. 우리 집에서 백화점까지 걸어가는데 나와 비슷하게 옷을 입을 사람을 여럿 봤다. 7명까지는 세었는데 그 이후에는 세지도 않았다.
백화점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교보문고에 들렀다. 이슬아 작가님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을 사서 읽다가 시간에 맞춰서 강연장에 도착했다. 이슬아 작가님은 빨간색 가죽 재킷을 입고 왔다. 여기서 3차로 그녀와 나는 다른 사람이구나 느꼈다. 빨갛고 번쩍이는 가죽 재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될까. 잠깐 상상 속에서 저 빨간 재킷을 나에게 입혀보았다. 저렇게 빛나는 옷이 내가 입으니 헌옷수거함에서 아무 옷이나 주워 입은 느낌이 난다.
강연은 재미있었다. 무대에 올라서 자신의 작품세계와 창작에 대해서 말했고, 나는 조용히 들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뒷줄 구석에 앉아 조심히 손을 들어볼까 말까 고민만 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강연의 끝 자락쯤에 용기가 생겨 손을 살짝 들어봤겠지만 아마 질문의 기회도 얻지 못할 터였다. 30대 여자분이 손을 높이 들고 질문했다.
“작가님. 모든 책을 다 읽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매일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놀랍습니다. 작가님의 앞으로의 창작 활동의 방향과 계획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이슬아 작가님은 특유의 흐리게 웃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저는 30년 전통의 국밥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어떤날은 좋은 글을쓰고, 어느 날은 별로이고. 이렇게 편차가 있는 글 말고. 매일매일 어느 정도 비슷하고 괜찮은 맛을 내는 그런 글을 쓰는 작가가되고 싶어요.”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처음으로 그녀와 나에게서 공통점을 한가지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작가님은 말을 이었다.
“앞으로 글을 계속 써나가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그런 작품을 쓰는데 목표에요.”
작가님은 자신도 놀랄만한 작품을 쓰는데 목표라고 했다. 나는 엉거주춤 들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깨높이로 올린 손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나의 목표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가까웠다. 대단한 작가가 되거나, 책이 많이 팔리는 것, 글을 비지니스화 하는것, 내가 자신도 놀랄 만큼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지금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나에게 최종 목표는 나의 행복과 자유였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내가 지독히도 행복해 진다면, 날개를 단것처럼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결국은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겠다.
내 나이가 60살쯤 되었을 때는 ‘난 이제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고 이길 바라고 또 바란다. 글이라는 도구로 내 속에 토해낼 것이 더는 없어서 펜을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을 쓰던 이 손으로 이제는 동네 할머니들과 부침개를 부쳐 먹거나, 마당에 꽃을 심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 손으로 가끔 아이들에게 편지 정도를 쓰고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 글을 왜 돈 만 원을 주고 보냐? 크크 지가 이슬아도 아니고.”
이 댓글을 보고 내가 어찌했을 것 같냐. 당연히 조용히 지웠다. 대댓글을 달지도 않고, 캡처해 놓지도 않고, 공론화시키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지웠다. 나는 빨간 가죽 재킷을 입은 이슬아가 아니고 검은 패딩을 입고 다니는 골디락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도 깜짝놀랄만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기다린다. 그녀 스스로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난 이미 그녀의 글에서 깜짝 놀란다. 난 언제나 그녀의 독자이고 팬이다.
내 손끝에는 몇 편의 글이 아직 남아있을까. 얼른 다 써내고 싶다. 오늘도 이렇게 한편을 써냈다. 오늘도 글을 써내고 내일도, 모래도 또 써내서 언젠가는 '이제는 다 썼다.' 하고 얼른 쉬고 싶다. 오징어와 새우를 잔뜩 넣은 부침개를 부치고 싶다. 마당에는 사루비아와 봉숭아를 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