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긴장하거나 당황하면 헛소리를 합니다. 지도 교수님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자꾸만 “교수님 오늘 날씨가 좋네요. 하하”라는 말이 나오곤 했어요.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데 말이죠. 결혼 전에 소개팅할 때도 그랬어요. 상대방이 자신을 영어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건 어떤 일인지를 한참이나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곤 합니다. “일은…. 어떤 일 하세요? 아아 영어 선생님이라고 하셨지.”
뭐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그날도 역시 똑같은 이유로 얼음이 둥둥 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후후 불면서 마시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한 출판사 사장님이 만나자고 메일을 주셨지요. 자신을 출판사 사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만나자고 했지요. 저는 그야말로 ’이런저런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아니면 신문 사설인지 자신도 아리송한 그런 글들을 쓰는 작가였어요. 아, 스스로 작가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민망하네요. 작가 지망생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요. 그냥 매일 쓰다 보면 나의 글도 모양을 찾아가겠지? 라는 조금 순진한 생각하고 있었지요.
드디어 나도 작가가 되는구나.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화장을 했어요. 화장대 깊숙이 들어있던 고데기를 꺼내 드라이도 했어요. 평소 교복처럼 입는 제시믹스 레깅스에 목이 늘어난 탑텐 발팔티 대신에, 이날은 옷장 구석에 있던 검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나갔어요.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였습니다. 자신이 출판사 사장이기도 하고 편집자이기도 하다고 소개한 그분은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시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대필작가를 해볼 생각 없으세요?”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애매한 웃음을 지었던 것 같네요.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아메리카노를 후후 불면서 말이에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길에 문득 ‘사주팔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나의 사주팔자는 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남이 하는 말이나 글을 그저 앵무새처럼 옮겨주는 것에 그쳐야 하는’ 그런 팔자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것입니다. 합리적인 의문이었습니다.
20대를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29살에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교수님은 종종 지적했습니다. “이건 진아 씨의 생각이잖아.” “진아 씨는 그냥 말을 옮겨주는 역할이에요.” 누군가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기는 기계가 되는 일이 통역이고, 글쓴이의 마음 깊은 곳을 읽고 그의 의중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게 번역인가? 이런 의문이 떠나질 않았고, 그래서 저는 통역가도 번역가도 되지 못한 그저 ’통·번역 대학원 졸업생’이라는 볼품없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필작가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사주팔자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진 것입니다. '나 오늘 출판사 사장님 만나러 간다’라고 설레발을 쳐놓아서 남편이 있는 집에 들어가기도 민망했습니다. 집 앞 카페에 앉았어요. 따뜻한 루이보스를 한 잔 시켜서 혼자 조용한 카페에 앉았습니다.
글을 쓰는 대신에 집 앞 떡볶이집에서 일하면 돈이라도 꼬박꼬박 받았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대신 청소기를 돌리거나 첫째 아이 한글 공부를 봐준다면 좋은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돈도 안 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이든 글쓰기를 왜 매일 붙들고 앉아 있나?”
따뜻한 루이보스 차 한잔이 비워질 때쯤에는 생각이 선명해졌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였습니다. 내 마음속에 분노와 우울, 절망과 열등감, 그리고 꼭꼭 숨어있던 사랑의 감정까지도. 만약 글이 아니면 내 몸 깊은 곳에서 분출되지 못하고 곪아갈 터였습니다. 다양한 감정들이 나의 오장육부를 파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대단한 작가가 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단 한 권의 책을 내지 못해도, 그리고 글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한 글쓰기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그래, 굶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한 나는 살 수 있으니까. 글쓰기는 내 삶의 마지막 보루이니까. 오늘처럼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거지같아 보이는 날도, 글을 쓰고 나면 조금 덜 초라하게 느껴지니까.
브런치에 <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는 이름으로 브런치에 응모했습니다. 19편으로 응모를 했지만, 사실 부모님에 대한 글은 120편이 넘습니다. 120편의 넘는 글에서 저는 더 찌질하고, 더 괘씸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아직도 갈구하는 어린아이이기도 하지요. 브런치 북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받아들임과 인정 뒤에 지금은 부모님과 마음 깊이 화해하였습니다. 37살 겨울 저는 비로소 제대로 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