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하게 차이 찾기 연습
“5시와 6시의 차이점을 50개 써봅시다. 물리적, 사실적인 차이도 좋고요. 감상적, 정서적인 차이도 좋아요. 운율을 맞춰서도 써보세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써보는 게 중요합니다.” 살면서 언젠가는 ‘카피’라는 것을 쓰고 싶다는 희망과 호기심으로 듣기 시작한 카피 라이팅 수업의 과제다. 50개라니. 일단 닥치는 대로 적어 본다. 당 충전 vs 밥 충전, 슬슬 신남 vs 완전 신남, 150도 vs 180도(시침과 분침의 각도), 상상 퇴근 vs 실제 퇴근, 영업 준비(브레이크타임) vs 영업 시작(저녁), KBS 뉴스 5 vs 6시 내 고향, 저녁 뭐 먹지 vs 대충 먹지 뭐, 텔레그램(업무용 메신저) vs 카카오톡(개인용 메신저). 29개까지 채우고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접어 둔다. 시작은 나쁘지 않다. 과제 제출까지는 일주일이 남았다.
과제 제출 기한 전날. 마감이 다가오자 쫄린다. 틈날 때마다 머리를 쥐어짠다. 처음 시작은 오후 5시와 6시 차이에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5시와 6시는 나에게 너무 꼭두새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시간으로 대입해서 생각해 본다. 새벽 vs 아침, 꼭두새벽 vs 그냥 새벽. 몇 개 안 나오자 다시 오후로 돌아간다. 뭐라도 할 수 있음 vs 뭐 하기 늦은 느낌, 딸 목욕 vs 딸 저녁밥, 아직도 vs 드디어, 끙끙(시간아 빨리 가라) vs 킁킁(배고프다 맛있는 거 없나) 50개를 가까스로 채워 제출했다.
수업 시간에는 사전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고 차이를 발견하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온 차이도 있지만 다른 차이를 찾아낸 이들 또한 많았다. 각자 50개씩 약 1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으니 500개나 된다. 어떤 기준과 생각으로 차이를 찾아냈는가? 기준이 되는 생각기둥으로 카테고리화할 수 있었다. 그중 신박한 내용을 추려보면 이렇다.
- 숫자 그 자체: 소수 vs 합성수, (숫자 생김새가) 각이 있다 vs 각이 없다.
- 5시는 일하는 시간: 노동요 vs 퇴근송, 소곤소곤 vs 왁자지껄,
- 5시는 마무리 시간: (전화야) 오지마 vs (시간아) 가지 마
- 음식: 커피 vs 술
- 콘텐츠: 마룬파이브 vs 데이식스
- 장소: 주민센터 업무 볼 수 있다 vs 없다.
무작정 50개를 적는 것도 방법이지만 시간 그 자체, 숫자 그 자체 등을 기준으로 생각을 구조화해서 차이를 찾아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생각 기둥’이다. 단순 시간 개념의 오전, 오후뿐만 아니라 장소, 콘텐츠, 음식 등 5시와 6시의 차이를 집요하게 찾아보면서 생각 기둥을 늘려나가는 것. 생각 기둥의 8할은 하는 일이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다. 리스트를 보면 각자의 직업 아이덴티티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수업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회사원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회의 vs 회식, (8시 출근) 5시 퇴근 vs (9시 출근) 6시 퇴근이 그렇다. 뷔페 1부 시작 vs 뷔페 1부 시간의 경우, 레스토랑에 종사하는 사람인가?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모두가 직장인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과 시각의 차이를 찾아내고 싶었으나 실질적으로 그게 가장 어려웠다는 코멘트가 동일하게 있었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차이는 평소에 내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술을 먹지 않는 내게 생소한 숙취 해소제 여명(오전) vs 땅거미(오후)와 같은 것. 반대로 직장인이지만 싱글인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예시는 내가 제출한 딸 목욕 vs 딸 저녁이다. 내게 주말 5시는 딸 목욕을 시키고 6시는 딸 저녁을 먹이는 시간이다. 아하.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특정 대상, 장소 등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 기둥이 늘어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더 많은 차이를 찾아낼 수 있겠구나. 이런 시도와 노력에서 비로소 신박한 것들이 나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5시와 6시의 차이를 랜덤 하게 써보았다면 그다음 스텝으로 특정 타깃을 정해서 차이를 찾아본다. 6살 아이에게 설명하거나(해님이 보이는 vs 해님이 안 보이는, 놀이터 vs 집) 술집 사장님 관점 (알바 출근 vs 손님 입장, 술 only vs 식사 반주 등)에서 차이를 설명해 보는 것이다. 업무에 적용해 본다면? 내 브랜드와 경쟁 브랜드의 차이점 50개 찾은 뒤, 실제 타깃에 맞는 것을 추려내는 것. 예를 들어, 매운맛 경쟁이 치열한 대한민국 라면 시장. 우리 회사에서 또 매운 라면을 낸다고 한다. 무엇으로 차별 점을 둘 것인가? 이 경우 시장의 대표적인 매운 라면인 신 라면과 열 라면의 차이 발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시즌의 과제는 2호선과 3호선의 차이 50개 찾기였단다. 직접 2,3호선을 타보지 않는 이상 10개도 못 찾을지 모른다. 5시와 6시의 차이 과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써보는 게 중요하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되새기며 어렵게 50개를 채웠지만 조금 더 쪼개고 생각해 볼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래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전두엽 회로를 늘린 것만 같은 기분이 좋았다.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농담의 빈도를 높이는 거예요.” 신해철의 말이다. 생각 기둥을 늘려 집요하게 차이를 찾는 연습을 하다 보면 클럽 메드의 ‘무엇이든 할 자유, 아무것도 안 할 자유’와 같은 인생 첫 카피를 쓰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 꼭 상업 카피가 아닐지언정 일기장에 나만 만족스러운 멋들어진 문장 하나일지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