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100점을 받다니!
"선생님 이거 좀 드세요."
"아이고, 멜론이에요?"
과일이 바뀌었다. 일종의 업그레이드였다. 과외 수업 중에 어머님은 항상 귤 또는 사과와 물 한잔을 주셨다. 그날은 멜론과 고구마 바나나 주스를 들고 오시며,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우리 딸이 이번에 100점을 받아서요. 너무 감사합니다."
혼자 살면 가장 먹기 귀찮고 힘든 게 과일이다. 사과나 배와 같이 깎아서 먹는 과일보다는 귤이나 블루베리처럼 먹기 편한 걸 선호하게 된다. 남은 과일들은 주인이 다시 찾아줄 때까지 냉장고에서 기다린다. 문제는 바쁘게 지내다 보면 이 과일들을 다시 찾을 때쯤 보슬보슬한 흰색 곰팡이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흰색이 점점 이끼 색으로 변모해가며 주변 귤에게 곰팡이를 퍼뜨린다.
"아이고 어머님, 매번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어머님이 말을 이어갔다.
"혹시, 저희 아들내미도 맡아주실 수 있나요? 애가 이번에 중학교를 들어가는데."
학생이 더 필요했던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었다. 어머님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이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 제가 친구 2명 더 데려올게요."
멜론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100점을 받아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었고 과외 학생 3명이 늘었다.
과외는 퇴사 후 첫 밥벌이 었다. 처음부터 의욕적으로 학생 수를 늘리고 싶진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에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 사람이 어려워서 전화를 받는 게 두려웠고 폰 진동소리가 조금만 길어져도 심적 부담을 느꼈다. 하루에 나와 연결된 100명 정도와 소통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정보를 요청하고 의견을 받고 회의를 하던 일상에 회의감이 들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우울감이 더 심해지던 때였다.
'가볍게 가자.'
무겁지 않아야 마음도 즐거울 것이고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첫 번째 학생은 '가람'이었다. 학기 시작 전에 같이 서점에 들러서 가람이에게 맞는 책을 함께 골랐다. 영어과외가 처음이고 '제가 이 공부를 왜 해야 해요?'라고 묻는 가람이에게 '먹고살려면 해야 되는 거야'라고 답하고 싶진 않았다. 수업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했다. 그 재미로 '성취감'을 주고 싶었다.
가람이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향 후 6개월 간의 예상 점수 그래프와 월별 수업계획을 보여주었다. 6개월 후의 점수 목표는 85점! 지금 성적에서 35점을 올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루에 단어 100개 외우기 같은 수업을 하면 도망가버릴 게 뻔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더듬더듬 읽는 연습을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을까. 수업 중 10 문장도 읽기 어려워했던 가람이가 2 지문을 읽을 정도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문제 풀기를 시작했다.
겨울방학 동안 연습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처음 보는 시험이었다. 영어시험이 끝나는 날 가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85점 받았어요!! 영어 쉽네! 저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워워~ 캄 다운캄다운, 몇 개나 찍어서 맞춘 거야? ㅋㅋ 아무튼 고생했어!"
계획했던 것보다 2개월 일찍 목표에 도달했다. 가람이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영어가 쉽다'는 말에 코를 눌러주고 싶었지만,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아요'라는 말은 내심 뿌듯했다.
가람이가 잘 따라와 준 덕분에 기말고사에서 100점을 받아왔고 어머님이 주신 멜론을 먹으며 지난 6개월간의 노력한 과정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이들과의 수업은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