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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22. 2020

< 자랑 >

2020. 8. 21.  /  D-132  /  임신 21주

임신 21주!! 이제 정말 절반이 지났다. 이만큼 잘 버티면 임신 업계(?)에서 주는 선물이 있다. 태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밀 초음파 검사라는 명목으로. 이 날까지 2년은 기다린 것 같다. 그 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치진.... 않았다. 잉?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다니. 최소 건망증. 부모라면 아이에 대한 일, 특히 안 좋은 건 잘 잊는다 하던데,  아내는 벌써 3주 전부터 들떠있었다. 이것저것 시나리오를 말하며 라면을 끓였다. A라면, B라면, 뚱이라면, 남편 얼굴이라면, 자신의 이마라면, 턱주가리아라면, 큰 바위 얼굴이라면. 온갖 신상 라면이 3주 간 출품을 준비했다.


이틀 전 받은 갑작스러운 소식. 남편은 병원 자체에 들어갈 수 없단다. 검사 참관 또한 당연히 안 된다. 코로나-19의 재확산 때문이었다. 아내는 태초부터 욕심쟁이에 매우 이기적인 데다 관심 자양분을 갈구하며 모든 걸 내 위주로 하고 싶어 하는 내 등을 토닥였다.


“남편~ 어떡해. 남편은 못 들어간데. 뚱이 얼굴 보고 싶을 텐데, 그래서 같이 신나 했는데 어떻게 해. 그래도 내가 가서 많이 물어보고 뚱이 얼굴 잘 찍어서 올게.”


잉? 눈도 안 마주치고? 위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차라리 뭔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찍긴 뭘 찍나. 본인은 검사대에 누워만 있고 의사와 간호사가 알아서 하는 걸 텐데.


쪼잔하다고? 응. 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검사를 진행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다. 코로나-19의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도 이해한다. 근데 그건 그거고, 나도 보고 싶다고! 회사도 일찍 나오기로 돼 있다고! 내꺼 반을 가진 아인데, 왜 다른 반을 준 사람에게만 생중계를 제공하냐고! 나도 본방사수 욕구가 가득가득하다고! 흐규흐규. 철 좀 들으라고? 이런 마음이 드는 걸 어떻게 하라고. 마음이 이미 생겼는데 왜 생겼냐고 마음에게 뭐라 할 수 있나? 우씨, 있어도 뭐라 안 할래!   


뚱이의 후원자가 임신 21주 기념행사에 걸맞은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고 하여, 검사가 끝나자마자 차에 몸을 실었다. 조수석의 역할은 운전자를 보조하는 것이련만, 아내는 흑백 사진만 뚫어져라 살펴봤다.


“남편~ 우리 뚱이 누구 닮은 거 같아?”

“둘 다 안 닮은 거 같아. 근데 언뜻 보면 자기 얼굴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 이마는 자기 이마를 닮은 게 분명한 거 같아. 볼록하잖아, 아~~~~ 주 좋아, 성공적이야. 뚱이쥬와~ 워어어 뚱이쥬와~~, 뚱이쥬와, 훠어어 뚱이쥬아!!”

“어이, 운전자. 운전에 집중하고 가만히 좀 있어봐. 턱은 얄상하니 당신 닮은 거 같아. 그리고 코는 오똑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쁜 거 같아.”


고슴도치. 이렇게 비이성적일 줄이야. 그리고 운전하라고 할 거면 나한테는 왜 물어보는 건데? 그나저나 나는 왜 신나 있었나. 하긴, 그럴 만했다. 이제는 뚱이가 제법 사람으로 보였다. 지난번 입체 초음파 사진은 ㅋㅋㅋㅋ 드래곤볼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 캐릭터 같았다. 외계인이 사람이 되는, 아니지 아니야. 캐릭터가 사람이 되는 요술 같은 일을 겪고 있으니 신나 있는 거겠지.


이랬던 뚱이가,
이렇게 사람이 됐지요.


아내의 자랑은 계속됐다.


“다른 애들은 얼굴을 손과 발로 가리고 있기도 한다는데, 우리 뚱이는 얼굴을 바로 보여줬어. 이뻐 죽겠어. 이 사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고 막 물어볼 수도 있겠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지? 검사 전에 초코우유를 마시면 아가가 더 많이 움직이는 건 알지만.”


잉? 누가 뭘 물어봐, 뭘 대답하겠다는 건데. 얼굴 보여준 건 뚱인데, 본인이 해줄 수 있는 말도 없을 거면서. 조언이라도 해주시겠다는 건가? 벌써부터 자식 자랑에 들떠있는 아내였다.


물론, 뚱이의 얼굴을 보곤 나도 매우 기뻤다. 또한 감사했다.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모두 예뻐 보였다. 안다, 이 또한 내가 한 건 없다. 뚱이가 스스로 해낸 거다. 그저 박수치며 대견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오히려 내 코골이 때문에 잠만 설쳤을 수도 있다. 자다 보면 아내는 이따금 다른 방으로 가 이불을 펴곤 했다.


근데 괜히 심술이 난다. 검사에 참관하지 못한 게, 본방사수를 못 한 게 아내 탓은 아닌데, 혼자 보고 온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정 부분 미웠다. 투정을 한 무더기 투척하고 싶었다. 아니, 초음파 사진을 잘 찍어오겠다는 말이나,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겠다는 말이나, 본인이 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해 나서는 게 영~, 쯧쯧쯧.


저러다가 나중에 뚱이가 서울대라도 가면, 아주 난리가 날 거 같다. ‘어떻게 하면 서울대 엄마가 될 수 있나.’, ‘우리 아이 서울대생 만드는 방법’, ‘중학생 우리 아이, 서울대 입학 플랜’ 따위의 주제로 경연이라도 하러 돌아다니려나. 서울대는 뚱이가 간 건데도, 마치 본인이 보낸 것처럼. 아주 웃기는 짜장·짬뽕이다. 왕 짬짜면일 것 같다.


난 아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진 않을 거다.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니까. 암, 그래야지. 후훗.


“자기 왜 그래 갑자기. 안 보던 TV를 보질 않나, 별것도 아닌 거에 소리 내 웃질 않나, 잘 먹다가 흘리질 않나. 뭔 일 있어? 뚱이 봐서 그래? 예쁜 건 뚱이인데 왜 자기가 난리야.”


아내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이 사람은 깜빡이가 없다. 그나저나...... 아니, 뚱이가... 뚱이가 음... 얼굴도 잘 보여주고... 눈코입손발 다 잘생긴 거 같기도 하고.., 헉,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대답 좀 해. 요즘 아주 내가 말하면 대답을 안 해. 혼자 가만히 있다가 표정 일그러지고, 또 갑자기 피식피식 웃기만 하고. 물으면 대답이라도 좀 해. 답답해 죽겠어.”


아니, 나는... 그냥 뭐... 그러게... 뚱이가 날 닮아 잘생겼나 싶기도 하고... 아니지, 아니지.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아니,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단어라도 제대로 선택해야지. 근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거. 에혀, 팔불출.


“뚱이야, 아빠 코 고는 소리도 자장가로 생각해. 알겠지?”


나는 지금 이 말을 왜 하는 건가. 뭘 더 바라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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