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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6. 2020

< 선택 >

2020. 8. 15.  /  D-138  /  임신 20주

“이번에 친정 갔을 때는, 친정아버지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가고 나서 열흘 뒤에 손주가 놀러 간다는데, 그때 손주랑 많이 노시려면 지금 과수원 일을 많이 해놓으셔야 할 거 같아서.”

“그러게. 뚱이가 생기더니 생각이 좀 달라진 건가? 멋있네!”

“조카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언제는 좋은 모습이면 좋겠어.”


아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장인의 주름이 깊어지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안타까워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조카가 태어나고, 정성을 몰아주는 모습에 처음엔 시샘이 났지만, 최근엔 오히려 그 시간들이 애석하단다. 조카의 기억은 나이가 찰수록 더 또렷해질 텐데, 그 순간마다 장인의 모습은 가장 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사 누구나 겪는 일은 때론 애통하다. 


고모로서 조카를 챙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조카의 어린이날 선물을 사곤 조카가 아닌 장인께 드린다. 장인께서 사준 것처럼 할 요량이었다. 조카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장인에게로 향한다. “우리 할아버지께 도와달라고 해볼까?”라며 조카의 시선을 장인께 집중시킨다. 조카에게 장인이 세상 능력자이자,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으로 각인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조카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고, 조카에게 인정받길 원하더니 이제는 조카의 관심을 오히려 뿌리치고 떠넘기고 있다. 그렇다고 마음의 크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휴대전화 속 사진을 보면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화상통화 한 번 해보려 안달이다. 다만 아내는 ‘고모’와 ‘딸’ 중에서 ‘딸’을 선택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뚱이가 곁에 온 이후 아내는 이러한 선택의 순간을 자주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끊고, 연애할 때는 입에도 대지 않던 따뜻한 티를 마신다. 임신하면 백천번 갈 거라는 왕복 5시간 거리의 해물탕 맛집도 기억에서 지운 듯하다. 이런 모습을 스스로도 의아해 한다. 아마도 ‘엄마’를 선택한 것 같다. 나중에 뚱이가 태어나면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뚱이야, 널 너무 사랑해서 커피도, 해물탕도 끊었단다." 뚱이도 임신을 해서야 이해할 수 있겠지?


비단 아내뿐만이 아니다.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번 휴가 때 특히나 더 느꼈다. 지금까지는 하루빨리 성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육아가 힘들다고 하니, 사춘기가 지옥 같다고 하니,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20살만 되면 자기 좋다는 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마쳤었다. 그런데 임신 후 처음으로 친정댁에 갔을 때, 이런 것들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뚱이 미혼자 만들기’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한다. 어떤 껄렁한 녀석이 뚱이와 데이트하는 꼴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든다. 요즘은 더 어린 나이부터 연애를 시작한다고 하니 준비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까지 흘러갔다. 뚱이가 잘 생겨야 하느냐, 못 생겨야 하느냐다. 잘 생겼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연애를 너무 빨리 시작할 거 같다. 결혼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렇다면 못 생겨야 할까? 인기가 덜 할 테니 결혼할 가능성도 줄지 않은가. 그럼에도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서 남자들의 마음을 녹이면 어떻게 하지? 아아, 벌써 걱정이 산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임신한 딸을 맞이하는 장인의 모습을 봐서인 것 같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앞두고, 장인께서 가족으로서는 두 번째로 뚱이에게 맛난 식사를 대접해주셨다. 첫 번째는 처형이었다. 처형은 손수 식사를 차려주셨다. 아내에게 집밥을 차려주지 못하는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아내 또한 하늘나라에 계신 장모께서 차려주신 것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고 했다. 


아, 뚱이의 가족 외식은 장인이 처음이었다. 가족을 맞이하는 처음 자리라 그런지 뚱이의 큰할머니와 이모할머니까지 함께 했다. 뚱이를 등에 업은, 아니 뱃속에 밴 아내는 자신을 위한 자리인양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숯불양념장어구이와 매운탕, 활어회였는데, 깊은 맛을 자랑한다는 부산 일광의 맛집이었다. 제법 맛이 괜찮았다. ‘엄마’를 선택한 아내는 장어구이와 매운탕을 집중 공략했다. 상석에 떡 하니 앉아서 여기저기 양 테이블의 음식을 차지했다. 가족들의 사랑도 듬뿍 받고, 뚱이 간식을 위한 용돈도 받았다. 내내 기분 좋아했다. 


식사도 식사였지만, 장인께서 아내와 뚱이를 대하는 모습이 전과 달랐다고 한다. 아내는 눈물 한 움큼, 웃음 백 움큼 머금은 표정으로 내내 즐거워했다. 그리고 결국 팔불출이 돼 동네방네 소문까지 냈다. 할아버지의 가장 젊을 때의 뚱이에 대한 사랑이 어땠는지 남기고 싶어 한 것 같다. 



“나 뚱이 일기장에 이런 거 다 써놓을 거야. 나중에 뚱이도 볼 수 있게.”

“응응, 근데 용돈은 뚱이 꺼야 자기 꺼야? 뚱이꺼면 뚱이에게 남겨놔야지. 가족들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면”

“그건 뚱이 맛있는 거 사주라고 하셨어. 뚱이가 맛난 거 먹을 수 있도록 내가 잘할 거야.”


......;; 결국 본인이 먹는데 쓰겠다는 소리다. 이건 ‘엄마’를 선택한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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