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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12. 2020

< 약 & 힘 >

2020. 6. 19.  /  D-199

꼰대로서 주절거리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을 ‘아는 게 힘’”이다. 오늘 이후로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24시간 응급실 전화번호가 산모수첩 몇 페이지에 적혀 있는지, 아내가 스킨로션을 몇 번째 서랍에 두는지, 생리대 사이즈는 어떻게 구별하는지, 엽산은 무슨 색인지, 속옷을 안 보이게 할 파우치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배우고 익히라고. 이를 위해선 시간을 쏟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루 한 번 거실 꽃병에 무심히 꽂힌 존재들이 고개를 쳐들고 피 튀기는 자리싸움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다음부터 매일매일 배움에 힘쓰고, 익히려 했다. (잔) 소리꾼들이 요구하는 것들이건, 스스로 하고 싶어서 건, 많이도 익혔고, 또 알게 됐다. 그럼에도 명창의 곡조는 멈추는 법이 없어, 다시 품속에 파묻힐 때까지 배우고 익혀야 한단다. 숙련도를 높여야 진국이 될 수 있으며, 비로소 목표한 것에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비로소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마음 편히.


단, 이 친구는 만나지 말아야 한단다. 병들게 하는 요술쟁이고, 죽음에도 이르게 하는 사신 같은 녀석이다. 이 친구가 부린 최고의 요술은 모든 의사를 앵무새로 만든다. 이 친구를 만나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목소리는 우상향을 향하다가 결국 우하향을 그린다. 흥선대원군이 빙의한다. 쇄국정책을 펼친다. 다가가면 쳐낸다. 빽빽한 숲에 있다가도 혼자만 광야로 향한다. 500년 된 나무처럼 세상 모든 것의 중심에 고개를 쳐 박고 홀로 고고해진다. 배우고 익힐 때 이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성급하다. 안심할 수 없다. 알고 나면 더 강한 녀석을 만날 수 있다. 가능성 99.99%. 스트레스.


이 녀석을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아는 것이 실제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는 게 많을수록 시선 또한 다양해지며, 직면하고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도 많아진다. 아는 그것들을 떠올려야 하고, 계산해야 하고, 검토해야 하고, 아무튼 최선을 다하게 된다.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효율적이면서도 정당하다는 명분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어쨌든 뭐든 결론을 짓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과가 효율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결국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변명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하게 된다. 그래, 최근에 정부가 발표하는 부동산 정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 집 가격, 옆 동네 집 가격, 저 지역 집 가격, 그 도시 집 가격.

전세 가격, 매매 가격, 3년 전 가격, 1년 전 가격, 1년 후 가격, 3년 후 가격.

생각하고 알고 계산하고 검토하고 최선을 다해 시간을 쏟아부으면 그만큼 더 강한 녀석을 만난다. 요술쟁이도 만나고, 사신도 어른거리고. 효율도, 정당함도 잊게 된다.


속이 쓰리다. 명창들이 강조하듯 결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이 녀석을 만나지 않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애초에 알려고 하지 않으면 이 녀석도 만날 일이 없는 것 아닌가. ‘유레카!’를 외친 이후부턴 후배가 굳이 시간을 내 만나주면 어설픈 조언이랍시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을 ‘아는 게 힘’”이라며 거들먹거리곤 했다.


오늘 오전 5시 30분, 꽃들의 자리싸움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우상향 하는 소리에 눈 틈이 갈라졌다. 꿈처럼 모자이크 된 주변과는 달리 또렷한 두 나무기둥 사이에서 무언가 자유 낙하하고 있었다.


‘후두득, 뚝, 뚜득, 후두두득.’

쏟아졌다. 소리가 두꺼웠다. 개그맨들이 서로의 얼굴에 갈기는 물볼기 소리보다 굵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멈춘 것으로 봐선 장댓비도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보리색 대지가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파르게 상승했던 그래프는 한껏 우하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잠깐만. 내가 닦을게.”


나중에 또 봐야 할 수 있어서 노을 숲 흔적들을 휴대전화 속에 간직하고, 꽃들의 전장으로 향했다. 녹색 수첩을 꺼내 숫자들을 발견하곤, 휴대전화에 빠르게 옮겼다. 꿈에서 로또 1등 당첨 번호라도 알게 된 것 마냥. 그리고 녹색 버튼을 눌렀다. 정박으로 같은 음만 내뱉던 휴대전화가 다른 박자의 다른 음을 뱉어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벙어리가 된 뒤였다. 아내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귀머거리도 됐다. 옷을 구겨 입고, 차키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의 주름살을 폈다. ‘조커’ 빙의의 초기 증상이었다.


코로나-19에게 붙잡혔다. '조커'라고 별 수 있으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조커가 도망치려 했다.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먼저 EV를 태우고, 절차를 모두 따랐다.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3층으로 가야한다는 걸 알면서 2층을 뛰어다녔다. 1분 남짓, 사신을 만나 영사(永死)를 얻은 듯했다. 3층은 99.99%가 남편 출입 통제구역이다. 아내는 이미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눈도 멀기 시작했다. 간간이 노을 빛깔이 묻어 있는 녹색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ㅇㅇㅈ 남편님!” 녹색 문이 개방되는 소리가 저승사자가 방금 막 죽은 영혼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초록 틈 앞에 섰을 때, 휴대전화가 울었다. 아내가 은밀히 건넨 힌트에 조커를 떠나보냈다. 저승사자, 아니 간호사의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내를 만나 지시사항을 받아 적었다. 사나흘 정도라는데도 필요한 물품들은 많았다. 차를 몰고 전투물자 보급소로 향했다.


‘탁, 타닥, 타다닥, 찌익 탁’ 알려준 전투물자들을 챙기고 샤워하고 옷을 입었다. 혹시 몰라 식욕이 감소한다는 약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배고프면 실수할 수 있으니까.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화투(花鬪)는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꽃들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다. 그것을 위해 계산하고 검토하며 혼신을 쏟고 있었다. 녹색의 산모수첩은 100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는 것에 감사했다.


주름 골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신인(神人)에게 전화해 투덜댔다.

“놀라서 전화했어요. (자초지종 설명 후) 회사에 보고까지 다 하고 나니 이제야 놀라네요.”

“그 상황에 무슨 보고까지, 너 재밌어. 오히려 위기에 비인간적이거든.”

“그래서 이런가, 잘난 척을 해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나 봐요. 매주 조용히 지나가는 법이 없네요. 허허허”

“그러게 말이야. 그 부분은 내가 그 존재와 이야기 좀 해볼 테니, 아내 잘 챙겨줘.”

“저는 누가 챙기나요?”

“내가” 듣기 좋은 말이다. 또 전화해야지.


안도와 함께 아내에게 갔다.

"수건은?"

"아 맞다."

"맞긴 뭘 맞아, 틀렸지. 그리고, 식욕감퇴 약을 먹었다면서 편의점에서 치킨을 먹는 건 뭐야. 그 새를 못 참고. 역시 치킨이 약이니?"

적당히 알면 혼난다. 제대로 알면 혼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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