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기 따악- 좋은 날씨네"
이토록 찬란한 봄 햇살이 이 우울한 마음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핑계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 만물이 꿈틀대고 따뜻한 봄이 오면 오히려 마음이 울렁울렁한다. 어디 가서 휙, 하고 사라져도 좋을 것 같은 나날. 나만 이런가 싶어서 찾아보니 실제로 3~5월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다고. 이러한 현상을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부른다지.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여니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 나도 나가볼까. 베란다에 먼지가 잔뜩 쌓인 자전거가 보인다. 바퀴를 만져보니 물렁하다. 공기주입기는 어디있었지. 다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게임이나 할까, 하다 한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공기주입기가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집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좋을 날씨. 자전거를 질질 끌고 공기주입기 앞에 도착했다. 이제 바퀴에 바람을 넣을 차례. 그런데 잘 되지 않네.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괜히 나왔나 싶어 울고 싶어질 찰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2
돌아보니 자전거를 끌고 온 한 남자가 서있었다. 끌고온 자전거의 바람이 반쯤 빠진걸 보니 아마 그도 자전거 바람을 넣기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도와주겠다고 했겠지.
깔끔한 옷차림에 잘정돈된 머리, 적당하게 낮은 목소리가 내 취향이라 백만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이건 그냥 바람을 잘 못넣는 내가 답답한것 뿐이라고 벌써 벨라인 드레스와 머메이드라인 드레스 중에 고민이며, 결혼식 장식꽃은 백합이 좋겠지 생각하는 나를 맘속으로 단도리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는 능숙하게 자전거에 바람을 넣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라는 질문에 속으로 '네, 역시 야외결혼식이 좋을것같네요.' 라고 생각했지만,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솔로는 서러워서 살수가없는 날씨네요."
...
나는 왜 이렇게 주책일까?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웃으면서 '그러게요,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추우면 추워서 솔로는 서럽네요.; 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아이는 아들하나 딸하나가 좋은데, 요즘처럼 힘든 세상에 애둘을 키울수 있으려나.
그의 말에 최대한 무난한 답변을 고르던 중, 아까는 말도 안듣던 자전거 바퀴가 금새 빵빵해졌다.
망했다, 상상력대비 말주변이 부족해서 더이상 이어갈 대화를 찾지 못한 나는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말고는 이 대화에 더이상 적절한 대꾸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멀쩡해진 자전거를 한쪽으로 끌고가자, 그도 본인인의 자전거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있는것도 조금 괴이할것같아서 한번 더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미래 내 아들과 딸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돌아서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3
2년 전, 나는 혼자 여행중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꽤나 차갑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이었다. 별다른 일정없이 발길이 닿는대로 걷기로 한 나는 한 광장에 도착했다. 한켠에 자리 잡은 길거리 예술가들의 음악소리, 분수대에서 뿜어졌다 쏟아지는 물소리,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의 소음들이 한데 어우러진 그 곳에서 여행지에서나 느낄만한 여유와 감동을 만끽하며 사람들 틈에 섞였다. 친구, 가족, 연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부러웠지만 '혼자도 좋아'하며 광장 가운데 자리한 분수대에 걸터 앉았다.
물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마도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입을 벌린 조개모양의 조각상이 있었다. 수많은 소망들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그 곳에 닿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내 소원도 하나 더해볼까. 주머니를 뒤져 적당한 동전을 꺼냈다. 조금 전까지 '혼자도 좋아'했던 나는 우습게도 '운명같은 사랑을 만나게 해주세요'라며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조개의 입을 향해 신중하게 동전을 던졌다. 긴장되는 순간 나의 소원은 정확하게 조개의 입속에 안착했다. 미신이겠지만 기분은 좋네. 사진으로 남겨야지.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내 휴대폰!
언제부터 없었던 거지? 어디에 두고왔나?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광장을 다시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어찌저찌 전화를 빌려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받아라.. 제발... 긴 신호음 끝에 전화 너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주인은 광장 한쪽에 위치한 카페의 주인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 카페로 달려가 휴대폰을 찾았다.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에게 카페 주인은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여 내 어깨너머에서 뭔가를 찾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감사는 본인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하라 말해주었다. 고개를 돌려 그의 손끝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떠날세라 카페 주인에게 한번 더 짧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아까의 나처럼 여유를 즐기고 있는 걸까.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 사람 구경을 하는 듯 가만히 가만히 고개를 움직이던 그녀는 꽤나 집중했는지 근처의 나를 의식하지 못한 듯 했다. 같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인기척에 놀란 듯 앉은 채로 고개를 꺾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와 작은 갈색 눈, 갸웃하는 그 모습까지 보송한 뱁새를 닮아 귀여웠다.
"오늘 날씨가 춥네요."
아. 휴대폰을 찾아줘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지 멍청아. 찬바람에 발갛게 물든 하얀 볼을 보다가 그만 다른 소릴 해버렸다. 너무 제 스타일이세요 라고 말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네, 솔로는 서러워서 살 수가 없는 날씨네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솔로시구나.
"제 휴대폰을 주워서 카페에 맡겨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사례를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보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혹시 한국에 돌아가서 만나게 되면 그 때 밥 한 번 사주세요"
...
그리고 오늘, 한강 공원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났다. 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녀는 대답했다.
"네, 솔로는 서러워서 살 수가 없는 날씨네요."
여전하다. 묘하게 어울리지 않은 그 말투. 잠깐 그 때를 회상하며 이번에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러게요,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추우면 추워서 솔로는 서럽네요."
한국에 돌아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나면 무슨 얘길 할까. 그냥 그 때 우겨서라도 밥을 살 걸 그랬나. 수없이 생각했지만, 막상 그녀를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머릿 속이 하얘졌다. 할 말을 고르던 중 그녀는 내게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나는 또 그녀를 놓칠까 봐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저랑 밥 한끼해요."
4
오 마이. 지져스. 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고? 아니야 침착하자.
도를 아십니까도 원래 처음은 친절해. 아니면 이거 사기꾼 아닐까? 너무 기초적인 수법인데 내가 외모만 보고 성선설을 믿게 된 게 아닐까. 세상 누구보다도 딱딱한 로봇처럼 뚝딱이는 사이 공백이 길어졌다.
”아.. 너무 전형적인가요? 그냥 지난날 은인에 대한 답례라고 해두죠.“
아 역시나. 내가 맞았다. 은인은 무슨 개뿔 내가 널 어디서 만났다ㄱ..... 만난 것 같은데? 만났네? 근데 어디서 만났지?
”아..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이거 저도 너무 전형적인가요?“
남자는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내 시간도 멈춘 것 같았던 것만 빼면 모든게 완벽했다.
”밥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나는 공기 빠진 자전거를 쿨럭쿨럭 가지고 나와 이제 막 공기를 채운 참이었지만, 바로 그 남자와 공원을 가로질러 밥을 먹으러 향했다. 이제 나온지 10분째라는 건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공원은 여기저기 큰 나무들이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어 제법 시원했다. 이따금 바람도 불어주는게, 나에게 얼른 결혼하라고 등 떠미는 엄마의 손 같은 느낌이었다. 주책이야 정말.
공원 중앙에는 작은 바닥 분수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정온도가 지나면, 분수에서 물이 나와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그런 곳이었다. 오늘은 그 정도 날씨는 아닌지 분수를 운영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
”아 혹시...?“
그는 아까 지었던 그 미소를 계속 지은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미소지을 때의 저 입꼬리에 빠져 죽겠다 싶다.
아, 아침에 생각했던 죽기 딱 좋은 날씨라는 건 이 입고리에 빠져 죽기 좋다는 거였을까.
아무튼 아침보다는 기분은 좋네!